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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동문선: 최치원 발해 인식의 양면성

by 초야잠필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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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최치원은 발해를 속말말갈의 후신으로 생각하여 고구려와는 별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謝不許北國居上表의 다음 구절이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 句驪未滅之時, 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 寔繁有徒, 是名栗末小蕃. 甞逐句驪, 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 至武后臨朝之際, 自營州作孼而逃, 輒據荒丘, 始稱振國.

위 구절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치원은 신당서, 구당서 중 신당서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최치원이 발해를 마냥 고구려와는 다른 말갈로만 보고 있었는가 따져 보면 동문선에는 이와 다른 취지의 최치원 글도 보인다. 

동문선 47권: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昔貞觀中。太宗文皇帝手詔示天下曰。今欲巡幸幽薊。問罪遼碣。盖爲勾麗獷俗。干紀亂常。遂振天誅。肅淸海徼。武功旣建。文德聿修。因許遠人。亦隨貢士。以此獻遼豕而無愧。逐遷鶯而有期。惟彼句麗。今爲渤海。爰從近歲。繼忝高科。

동문선 47권: 與禮部裵尙書瓚狀: 昔者勾麗衛國。負險驕盈。殺主虐民。違天逆命。太宗文皇帝。震赫斯之盛怒。除蠢尒之群兇。親率六軍。遠廵萬里。龔行天罰。靜掃海隅。勾麗旣息狂飈。劣收遺燼。別謀邑聚。遽竊國名。則知昔之勾麗。則是今之渤海。

위 두 글을 보면 고구려의 타다 남은 재라고 했을망정 고구려의 후신이 발해임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최치원이 발해를 속말말갈의 후신으로 보았다는 사불허북국거상표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글이라 할 것이다. 

사불허북국거상표에 쓴 최치원의 내용을 보면 그는 발해의 건국 내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최치원이 쓴 글에 나오는 발해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글에 따라 말갈의 후예, 그리고 고구려의 후예로  다르다. 

최치원의 발해에 대한 인식은 이 처럼 다면적으로서 신당서, 구당서의 상반된 발해인식이 그에게서 동시에 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발해가 고구려 후신이냐 말갈의 후신이냐 하는데 대한 판단은 그 당시에도 이미 사람들 기분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발해가 고구려 후신, 말갈 후신이라는 것이 어느 한 쪽은 맞고 다른  쪽은 틀리고, 당시에 그렇게 받아들여졌던 것이 아니라 이 두가지 인식이 그 당시에도 이미 공존하고 있었으며 기분에 따라 이렇게도 이야기 햇다가 저렇게도 이야기 했다가..

심지어 그런 상반된 경향이 최치원이 쓴 글 안에서도 보인다는 말이다. 



*** Editor's Note ***

신당서건 구당서건 최치원 사후에 완성된 사서들이라 최치원의 발해에 대한 시각이 신구당서 어느 쪽인가 하는 말은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단, 훗날 신구당서로 선택된 이전 기록 혹은 논급들을 최치원이 취사선택했을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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