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잘 알다시피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로
원래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차례가 아니었는데
개로왕 대에 한성백제의 멸망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게 그에게도 왕위에 오를 기회가 왔다.
왜에 있던 동성왕이 귀국할 때
그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왜병이 있었는데
그 숫자가 일본서기에 의하면,
500명이었다.
눌지왕 때 "신라에 주둔"했다는 고구려병 100명은
애초에 속국 지배용으로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었던 셈이다.
눌지왕이 신라영토 내의 고구려병 100명을 죽이게 한 첫째 이유는
그렇게 해도 될 만큼 그들의 숫자가 미미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는 호태왕과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
신라가 고구려에 보낸 인질, 그리고 신라땅에 주둔했다는 고구려군만 보고
신라가 이때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때 신라가 인질을 보낸 건 고구려에만 보낸 것이 아니고 왜에도 보냈으며,
남의 나라 땅에 백여명 병력을 보낸 건 고구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왜도 그랬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왜의 속국이겠는가?
백제가 왜의 속국이겠는가?
반응형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개토왕비와 신공 49년조: 일관성의 딜레마 (21) | 2024.08.16 |
---|---|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조의 경우 (21) | 2024.08.16 |
속국 신라에 보냈다는 고구려 병사 100명 (26) | 2024.08.15 |
에도시대 연구가 더 필요함 (23) | 2024.08.15 |
광개토왕의 대업적은 왜 사서에 수록되지 않았을까 (24) | 2024.08.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