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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조의 경우

by 초야잠필 2024.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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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岡芳年 筆 「日本史略図会 第十五代神功皇后」

 

이제 광개토왕 비문 시각으로 맨 밑에 첨부하는 일본서기 기록을 보자.

어떠한가? 

알다시피 일본서기는 우리 삼국사기보다 성립연한도 더 빠르다. 

아래 기록이 과연 호태왕비문의 광개토왕 남정기사와 어느 정도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아, 물론 광개토왕의 남정기사건, 신공황후 49년조이건 간에 

양쪽 모두 삼국사기에는 없다. 

호태왕비에서 고구려인의 시각은, 신공 49년조에서 왜인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읽어보면 매우 비슷하구나, 하는 점을 느낄 것이다. 

이 신공 49년조의 기록은 사실일까? 

아니면 어떤 사실을 뻥튀겨 쓴 이야기일까? 

호태왕비와 신공황후 49년조는, 둘 다 한국 기록에는 없지만 자국의 승리를 크게 특필해 놓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는 그대로 믿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고 왜곡된 기술이라 한다. 

이런 양자간 해석의 차이는 타당한 것일까? 

둘 다 취신하거나 둘 다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卌九年, 春三月.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沙沙奴跪 【是二人, 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 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是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 【今云州流須祇】 , 相見欣感, 厚禮送遣之. 唯千熊長彦與百濟王, 至于百濟國, 登辟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爲坐, 恐見火燒. 且取木爲坐, 恐爲水流. 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絶無窮, 常稱西蕃, 春秋朝貢. 則將千熊長彦, 至都下厚加禮遇, 亦副久底等而送之.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249) 봄 3월에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곧바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두 사람은 그 성姓을 모른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다】 에게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바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또한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 네 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 왕 부자와 황전별⋅목자근자 등이 의류촌意流村 【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 한다】 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백제 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았다.

백제 왕이 맹세하며 말하기를,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만년 영원토록 늘 [백제를]서번西蕃이라고 칭하며 봄가을로 [일본 황실에] 조공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보좌하여 보냈다. 『일본서기』권9, 「신공황후」 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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