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와
광개토왕비는 사실 거의 비슷한 구조의 글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근초고왕 시대에 있었다는 남정을 일본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가 전남 지역까지 정치적으로 통합했다는 근거로
우리측에서 이 기록을 이용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측에서 이 기사를 이런식으로 믿는다 해도,
정작 왜의 시각-.
즉 백제가 남정 이후 왜를 주인으로 섬기기로 했다는 부분은 우리가 또 믿지 않는다.
같은 기사에서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는 광개토왕비를 보자.
광개토왕비의 내용, 특히 이 시대 광개토왕의 남정기사 일체,
백제에게서 항복을 받았다던가,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군이 가야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며 정벌하고,
인심좋게 신라 수병에게 차지한 땅을 지키게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신공 49년 조에 차지한 땅을 백제에 줬다는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노객이 되었다는 부분,
모두 그대로 취신한다.
딱 한 군데만 빼고,
바로 신묘년 기사다.
이건 또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기사의 취사선택에 있어 임의적인 부분이 많고
일관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
김단장 말씀하신 것처럼
필자도 같은 생각이다.
광개토왕이 정말 백제의 항복을 받았을까?
백제 아신왕은 정말 광개토왕에게 앞으로 노객이 되겠다고 했을까?
신라는 정말 풍전등화의 상태에서,
왜와 가야는 정말 고구려 철기군에 의해 평정되어 신라가 간신히 살아 남았을까?
그리고 그 후에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을까?
어느 하나도 삼국사기 기록에는 없다.
오직 호태왕비나 충주 고구려비가 그렇게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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