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심상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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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백제, 삼천궁녀, 의자왕, 백마강’ 하면 부여가 떠 오른다. 그리고 오층석탑도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오층석탑은 백제 때 만든 탑 이상에 대해서 이론이 많다.
물론 백제가 망하고 난 직후 만들어졌다고도 얘기할 정도다.
우선, 오층탑이 세워진 절의 이름부터 문제이다. 定林寺(정림사)는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조각에 새겨진 이름이다.
이 점은 그 이전부터 정림사로 불렀을 개연성이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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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정림사는 언제 지어졌는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전후(6세기 중반) 혹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로 보고 있다.
두 의견 모두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다만, 소조상, 6세기 중후반대의 연화문와당, 깨진 기와 조각을 쌓아 만든 건물의 기단 형태 등을 통해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직후인 6세기 중반으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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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생산품을 사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공주 대통사에 사용한 판단원형돌기식의 연화문와당이고, 이 기와는 부여에서 다수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 와당이 정림사에는 거의 없고, 정림사식(판단첨형)의 와당이 다수를 점한다.
즉, 천도 전, 사비도성의 기본적인 구조(외곽성인 나성과 왕궁 및 왕성)는 만들어지고, 백제가 천도한 후 점진적으로 도성이 채워져 가는 첫 단계에 정림사가 만들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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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정림사 탑은 목탑인가? 석탑인가?. 목탑으로 본다.
왜냐하면, 탑과 금당을 감싼 회랑 안쪽에서 탑과 금당 내부를 장식한 소조상이 다수 출토되었고, 석탑보다 넓은 탑 기초시설(축기부) 그리고 석탑보다 시기가 빠른 사찰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목탑은 무슨 연유에서 석탑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612년 대홍수와 관련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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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는 정림사에서 출토된 와당의 형식 편년의 중심이 6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이 기와의 사용을 인정하면 7세기 전반이 아닌가 한다.
이즈음 석탑 남편에 연못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 시점에 정림사는 화염에 휩싸였을까?
발굴자료로 보면 회랑과 강당의 터에서 불탄 흔적이 관찰되었다고 하지만, 석탑에서는 그 당시에 불탄 흔적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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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백제가 망할 당시에 정림사는 사찰의 기능이 저하될 정도로 사역에는 훼손이 있었을 수 있지만, 오층탑과 연못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유지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정림사가 운영되지 않았나 한다(연지에서 인화문토기가 다수 출토되었음).
나아가 사역 내에서 통일신라시대 소수 와당(보수와) 등과 당시의 토기류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는 별다른 개축은 없이 사용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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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년 정림사에는 석조불상이 축조되고, 대장전이란 건물에 안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자리는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다.
그럼 이 당시 정림사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연지는 이미 주변 퇴적토로 매몰되었고, 그 북편에 사찰 중문이 남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동회랑과 서회랑 안에 석탑과 금당이 존재한 모습이다.
그리고 석조불상이 있는 대장전이 남북 일직선으로 공존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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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상은 하다.
금당이 두 곳이라는 점과, 기존 금당도 새로 지었으면 정림사 사역 내에서 격이 가장 높았을 것이기 때문에, 금당에 사용하는 기와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지만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장전과 금당이 공존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정림사는 터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 내리는 2024년 5월 5일, 아침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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