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士林이 《표준대국어사전》에는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라고 설명하였고 유림과 같은 말이라고 하였다. 또한 국사교과서 등에서 신물이 나게 대했던 사림파士林派는
“조선 초기에, 산림에 묻혀 유학 연구에 힘쓰던 문인들의 한 파.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하고 성종 때부터 중앙 정부에 진출하여 종래의 관료들인 훈구파를 비판하여 사화에 희생되기도 하였으나,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그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라고 설명하였다.
‘사림파’는 근대 역사학 연구의 성과 가운데 하나다. 훈구勳舊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에는 그 대척점이 사림이었다.
그렇다면 그 공신들이 다 사라진 선조 이후에 사림의 대척점은 무엇이었을까?
율곡 이이는 이들을 유속流俗 또는 속류俗流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전 시기를 통해 훈구도 유속도 스스로 사림이라고 일컬었고, 지방의 이름 없는 선비까지도 사림이라고 스스로 일컬었다.
그럼 개나 소나 다 사림이라는 말이 아닌가?
사림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국어사전의 저 설명은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훈구나 유속은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들도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였다. 그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조선왕조실록 어디를 보아도 원문에 ‘士林派’라고 된 곳은 없다. ‘士林’이라는 용어가 나올 뿐이다. 그럼 사림파는 도대체 어디서 온 말일까?
아주 오래된 기억에만 의존하건대, 이병도가 1959년 철필 등사본으로 서울대 문리대 사학연구실에서 펴낸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에서 처음으로 사림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저 자료 천신만고 끝에 복사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못 찾는다.)
오늘날 연구성과로 보면 빙긋 웃고 말겠지만, 당시에 조선 전기 유학의 흐름을 사림세력과 훈구세력의 역학관계로 파악한 이병도의 시선은 참으로 명쾌한 것이었다. 이 영향으로 사림파와 훈구파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사림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결론지어 말하면 문인 사대부 계층 또는 지식인층을 이르는 대명사였으나 거기에 ‘착하다’ 또는 ‘선하다’는 형용하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선한 문인 사대부 계층 또는 지식인층”이라는 말로 풀어 한문으로 쓰인 사림을 이해하면 정확히 들어맞는다.
사림은 조선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앞서 풀이한 지식인층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고려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연구성과를 답습만 하다 보면 원래 그것이 무엇인지를 잊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테이플러가 그 상표인 호치키스로, 굴착기가 생산 회사인 포크레인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사림파가 과연 ‘산림에 묻혀 유학 연구에 힘쓰던 문인들의 한 파’였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한둘 그런 이를 내세웠지만, 대부분은 권력투쟁의 대척점에 불과하였다. ‘재지중소지주在地中小地主’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의 연구가 버젓이 우리를 지배한다.
사림파든 훈구파든 지배 세력은 저 김홍도의 벼타작 그림 속 지주와 다름이 없었다. 저 이도 상소문에서는 스스로 사림이라고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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