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한국사를 일본사에서 보는 입장이 은연 중에 우리에게 파고 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 필자가 예를 든 잡곡농경에 대한 우리의 시각.
그 시각 상당 부분은 일본사에서 쌀농사와 잡곡농경을 보는 시각에 영향을 받았다.
알다사피 중국은 잡곡농경에 대한 비하, 도작농경에 대한 찬상이 있을 수가 없다.
잡곡농경은 황하문명의 기반이며, 양자강 유역의 도작 농경은 그 지역 고유문화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화북의 잡곡농경보다 우월하다거나 고도의 농경이라 우길 만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독 쌀에 대한 찬상, 잡곡에 대해 우습게 보는 우리의 시각은
일본의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이러한 시각에 따라 잡곡농경을 저열한 초보적 농경으로 보는 시각이 우리에게 아직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각대로면 우리의 부여, 고구려도 저열한 문명으로 자리 매김 지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두자.
쌀에 대한 고평가 때문에 부여 고구려도 도작이 있지 않았겠냐는 말도 보는데, 부여 고구려는 엄연한 잡곡문명이다.
또 다른 일본사 시각이 한국사에 파고든 이야기는 소위 "기마민족론"이다.
세계사적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이나 일본이나 둘 다 기마민족은 아니다.
말에 관한 한 한국은 중국보다도 도입이 늦다.
우리는 오랜 상고시절부터 말타고 다니며 멋진 폼으로 활을 쏘는 기마민족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하지만
말을 길들여 처음 타고 다니며 전 세계로 이를 퍼뜨린 사람들은 우리와 무관한 인도-유럽어족 사람들이다.
한국이 "기마민족"이라고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일본정복설" 때문으로
일본사에서 말이 5세기경 돌발적으로 출현하여 거대고분으로 대표되는 고분문화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
이 변화의 동력으로 에가미 나미오는 "기마민족"인 고구려를 지목했다.
이 설이 맞냐 틀리냐와는 별도로,
일본의 이 시각 때문에 한국인은 졸지에 "기마민족"으로 스스로를 인지하게 되었는데
사실 한국사는 "기마민족"과는 거리가 있는 역사다.
한국은 말을 다른 나라보다 특별히 일찍 타고 부린 것도 아니고, 기마민족이라 할 만큼 말을 항상 이용한 나라도 아니다.
다만 일본이 말 도입이 너무 늦다보니 상대적으로 이보다 빠른 한국이 졸지에 "기마민족"이 되어버린 셈인데,
이 역시 세계사의 눈으로 보정이 필요한 시각이라 하겠다.
요약하면,
일본사의 눈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그만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대단찮게 생각하다가,
일본의 와비차 도인들이 찬상하자 부랴부랴 한국문화의 최대 상징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조선시대 막사발도 마찬가지인데,
이제 한국사도 일본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눈으로 다시 볼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 editor's note ***
저 스스로는 한국학 혹은 한국고고학을 한다 하겠지만 실상 따져보면 내가 일본학 일본고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내가 늘상 이야기하듯이 한국고고학은 실상은 일본고고학이며 더 따지면 북큐슈고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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