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는
“삼청동(三淸洞)은 소격서(昭格署) 동쪽에 있다. 계림제(雞林第) 북쪽의 어지러이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들은 조밀한데, 깊숙한 바위 골짜기를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낭떠러지가 된다. 물이 벼랑 사이로 쏟아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듯한데,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과 같다. 그 밑은 물이 괴어 깊은 웅덩이를 이루고, 그 언저리는 평평하고 넓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한데, 장송(長松)이 엉기어 그늘을 이룬다. 그 위쪽의 바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모두 진달래와 단풍잎이니 봄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쳐 진신(縉紳)들이 많이 와서 논다. 그 위로 몇 걸음을 옮기면 연굴(演窟)이 있다. [三淸洞在昭格署東。自雞林第而北, 淸泉瀉出亂松間。緣流而上, 山高樹密, 巖壑深邃, 行未數里, 有巖斷絶成崖。水洒崖窾垂白虹, 散沫如跳珠。其下貯水爲泓, 其傍平衍可坐數十人, 長松交蔭。其上挾巖皆是杜鵑楓葉, 春秋紅影照曜, 縉紳之士, 多來遊焉。其上數步, 則演窟也。]”
라고 하였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에도 그대로 옮겨져 두루 이용되었다.
여기에 그간 ‘계림제(雞林第)’라고 번역한 것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계림군(雞林君) 정효상(鄭孝常, 1432~1481)의 집을 이른다.
정효상은 행주기씨 기채(奇采)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처와 장모의 악독함이 고금 제일이라 매를 맞고 살았다.
기채는 누구인가? 고려말 기철(奇轍, ?~1356)의 유일한 현손으로 그에게는 정효상에게 출가한 딸 하나만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적몰을 모면한 기철의 재산은 모두 정효상 처의 것이었으니, 맞고 살았던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막대한 재산으로 서울에 부동산 투자를 일삼았던 듯하다. 《성종실록》 12년 1월 27일 임인 기사에 따르면
성종께서 이르기를,
“조종조(祖宗朝)에도 풍수지리설을 써서 모든 산줄기의 금기(禁忌)할 곳에는 사람이 발로 밟는 것을 금하기도 하고 집 짓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아랫사람이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산줄기를 파거나 집을 짓는 자가 상당히 많으므로 철거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듣건대, ‘소격서(昭格署) 앞에 정효상(鄭孝常)의 집이 두 채나 있으며, 재상(宰相)들이 서로 다투어 두 채씩 짓기 때문에 소민(小民)들이 성중(城中)에 거접(居接)할 수 없다.’ 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다. 한 채만 지어서 살다가 적장자(嫡長子)에게 전하여 주면 충분할 터이고, 중자(衆子)는 장가들어 스스로 집을 짓게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上曰: "祖宗朝, 亦用地理之說, 凡諸山脈禁忌處, 或禁人踐踏, 或禁造家舍。 邇來下有慢上之心, 掘去山脈, 造家者頗多, 故撤之耳。 聞昭格署前, 鄭孝常之家有二, 宰相競造二家, 故小民不得居接城中, 其弊不小。 只作一家居, 而傳諸嫡長足矣, 衆子則可娶妻, 而自作家矣。"]
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성현이 《용재총화》 마지막에서 언급한 연굴(演窟)은 무엇일까?
그의 시 〈희량과 함께 연굴사에서 노닐다 경술년(1490, 성종21) 〔與希亮遊演窟 庚戌〕〉라는 시를 통해 연굴사를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고즈넉한 삼청동에 절간이 있어 寺在三淸洞
숲이 깊고 주변이 서늘하여라 林深境界寒
돌계단 꼭대기에 샘이 흐르고 石泉懸絶磴
단 위에는 단향목의 그늘이로세 檀樹蔭平壇
법당에선 목탁 소리 들려오는데 佛靜僧鳴磬
대청의 나그네는 음식 권하네 堂閒客勸餐
친구들과 얘기하며 올라가자니 親朋携手話
길이 무척 험하지만 두렵지 않네 不怕道路難
연굴암은 조선 초에 백악산에 있던 암자였다. 《세조실록》 7년 5월 1일 경자 기사에,
5부(五部)에서 도성(都城) 내외의 신구(新舊) 사사(寺社)를 기록하여 올리니, 백악산(白岳山)의 북초암(北草庵)·연굴암(衍窟庵)·동초암(東草庵)을 헐고, 백악산 바위 굴에 사는 중 해심(海心)을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연굴암과 연굴사는 기록에 따라 연굴(衍窟)과 연굴(演窟)을 혼용하는데, 같은 절을 이른다.
그러나 성종 때 인수대비(仁粹大妃)에 의해 이 절들이 도로 지어졌는데, 원래 위치가 아닌 삼청동 소격서 인근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하지만 성종의 중전인 윤씨를 폐하고 사사하도록 주도한 할머니와 갈등한 연산군은 9년 11월 10일 계유에 “연굴사(演窟寺)를 철거하라.”는 전교를 내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26일에는 “연굴(演窟)·복세암(福世菴)을 이미 철거하였지만, 거기에 바치던 잡물은, 각 관사에서 전대로 하도록 하라.”고 전교하였으니, 인수대비의 강력한 항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산군은 이를 옮겨 짓기로 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 강력히 항의하자, 연산군은 “"두 절이 모두 대비의 원찰(願刹)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대간의 반대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연굴사를 훼철한 이듬해 소혜왕후(昭惠王后) 즉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났으나 연산군은 이를 옮겨 지은 듯하다.
연산군 12년 8월 5일 정승에게 “강징(姜澂)이 경연(經筵)에서, 연굴사(演窟寺)와 복세암(福世菴)은 옮겨 배치할 수 없다고 아뢰었으니 형신(刑訊)하라.”라고 한 기사를 보면 인수대비 상이 끝나고 이를 옮겨 지은 듯하다.
그렇다면 세조가 헐었던 연굴암은 어디이고, 연산군이 헐기 이전 소격서 인근에 있었던 성현이 시로 읊은 연굴사는 어디이며, 연산군이 옮겨 지은 연굴사는 어디일까?
세조가 연굴암을 헐고 그 이듬해 연굴암 동쪽 고개에서 화포를 쏘자 뛰어나온 표범을 임영대군이 잡았으므로 애초 연굴암은 대단히 위쪽에 있었다가 인수대비가 소격서 인근에 옮겨 지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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