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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라던 해인사 ‘불법승보인佛法僧寶印’에서 떡하니 1457년 제작이라는 증거가?

by taeshik.kim 202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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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 제작으로 드러난 해인사 ‘불법승보인佛法僧寶印’

 
한국 문화재 업계에선 조선후기 신화라 부를 만한 도장이 있다. 제작시기를 가늠하기 힘들 적엔 덮어놓고 조선후기 운운한는 낙인을 찍고 만다. 보통 실제로는 이보다 올라가므로, 넉넉잡아 손해 안 볼 요량으로 조선후기라 퉁치는 것이다. 올라가면 욕을 덜 먹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란 말인가? 

해인사가 소장한 인장引章 중 하나로 ‘불법승보인佛法僧寶印’이란 성보聖寶가 있다. 이를 조사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고서는 제작시기를 못 찾으니 조선후기라고 퉁치고 말았다. 

송광사성보박물관(관장 고경스님)이 오는 15일 개막해 8월 15일까지 이 박물관에서 개최하는 삼보종찰三寶宗刹 소장 인장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이 유물을 해인사에서 빌려와 조사와 사진 촬영을 하면서 이 도장 한 쪽 귀퉁이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해인사 佛法僧寶
해인사 인장함

 
그 몸통에 해당하는 인신印身 윗면에서 음각한 ‘천순원년팔월天順元年八月’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것이다. 잉? 순천 원년이라면 명明 대종代宗 경태제景泰帝 8년이면서 영종英宗 천순제天順帝 복위 원년을 말한다. 조선왕조로서는 수양대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그 자리에 앉은지 3년째 되는 해로,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1457년이다. 

조선후기라던 제작 연대가 물경 500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이번 특별전을 준비한 최고 성과 중 하나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를 포함해 이 자리는 불보종찰 통도사, 법보종찰 해인사, 승보종찰 송광사라 해서 한국에서 이른바 삼보종찰로 퉁치는 이 세 유서 깊은 거찰이 소장한 유물 중에서도 오직 도장 인장만을 가려뽑아 그 실상과 그 의미를 제대로 짚고자 하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가없는 상찬을 받아 마땅하다. 
 

송광사 불법승보 印
송광사 인주함. 이런 유물도 남았구나

 
 
인장은 확인이며 보증이다. 저들 사찰은 깊은 내력 만큼이나 그것이 보증하는 성보가 많고 개중에는 인장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를 위해 송광사성보박물관 앞으로 통도사 소장 인장과 인장함 관련자료 17점과 해인사 소장 인장 및 관련 자료 27점, 송광사 인장 및 관련 자료 30점을 합친 총 7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불러모으고 이참에 깡그리 세부 조사를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저 해인사 인장의 새로운 내력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저때 해인사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런 굳은 일을 도맡아 하는 송광사박물관 김태형 학예실장 말이다. 

이는 그해 2월 세조가 신미信眉(?~?)스님 등에게 명해 해인사 대장경의 제3차 인경印經을 진행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해 6월에 세조가 예조에 명을 내려 ‘불법승보佛法僧寶 네 글자를 새긴 삼보인三寶印을 주조鑄造해 지평砥平의 용문사龍門寺에 보내라’고 했다는 기사를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조는 6월에는 용문사, 그리고 『세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8월에 해인사에 각각 삼보인을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용문사는 세조의 비호를 받은 사찰로 매년 봄가을에 식염食鹽을 주기도 하였으며, 1456년 즈음에는 수륙사水陸社로 추가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저 무렵에 새긴 인장이 기적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본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이런 인장 일제 조사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불교계 통제 관리를 위해 도입한 31본산 본말사제도 시행 전에 조선 왕조에서 이미 수사찰首寺刹을 중심으로 한 수말사首末寺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송광사와 해인사, 통도사에 각 지역 수사찰임을 증명하는 인장들이 남아 있다는 데서 그런 증거가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저 세 사찰을 삼보사찰이라 합칭한 것은 언제쯤일까? 이것이 못내 평소에도 궁금하던 차에 김 실장께 문의하니 "조선후기에는 확실히 그런 개념이 있었는데, 언제적부터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인장을 통해 그 이전 그런 원초라고 할 만한 흔적들이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통도사 불법승보 印
통도사 인장함

 
삼보사찰이라는 개념의 성립과 인식은 당시 불교계에서만 통용된 것이 아니며 조선 사회에 완전히 정착해 나라로부터 공인을 받아 관련 인장을 발부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통도사의 ‘불종찰원장인佛宗刹院長印’, 해인사의 ‘법종찰총섭인法宗刹摠攝印’, 송광사의 ‘승종찰원장인僧宗刹院長印’이 그것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이 세 사찰을 각각 불법승 삼보 사찰로 분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준비한 박물관은 사찰 인장이 단순한 도장이 아니라 당시 사찰 지위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유물임을 확인했다고 강조한다.

사찰 인장은 개별 사찰에서 사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예조禮曹에서 제작돼 각 사찰로 발급되었다. 이는 관인官印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또한 용도가 폐기되거나 주지 교체 등의 상황이 발생하면 일단 관아에 반납한 후 다시 받아와 사용했다는 사실도 인신등록印信謄錄 등을 통해 확인됐다고 한다.
 

특별전 포스터

 
사찰 인장은 보통 4~9자를 새기는데 이에는 각 시대별 사찰 승직僧職 명칭 변화에 대한 정보도 담겼단다.

예컨대 송광사의 경우 주지住持는 보조국사 때부터 1831년까지 사용되었다가 1832년부터 1902년까지 총섭으로 불렸고, 1903년부터 1904년까지는 ‘섭리’, 1905년부터 1911년까지는 ‘판사’, 이후 오늘날까지 ‘주지’로 이어지고 있음을 관련 인장을 통해서도 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번 특별전은 매주 월요일 정기 휴관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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