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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의 특별하지 않은 박물관 이야기

한양 사람들로 보는 한양(3): 준비하다가 엎어진 상설전 개편

by 느린 산책자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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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람으로 바라보기’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이것은 나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우리 박물관에서는 여러 번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유만주의 한양’이라는 전시라든지, ‘명동 이야기’같은 전시가 그러했다. 

뭐, 굳이 제목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의 전시는 거의 그러했다. 여타의 박물관도 그렇겠지만, 늘 ‘다른 곳과 어떻게 차이를 줄까’라는 점이 고민이었고, 이것이 그 고민의 해결법 중 하나였던 것이다. 


타 박물관과 어떤 차이점을 둘 것인가

내가 1년간 준비했다가 엎어진 상설전시 개편도 그러했다. ‘한양 사람들의 이야기로 한양의 공간을 보여주자’, 이것을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실과의 차이점으로 만들자는 것이 개편 방향이었다. 

물론 이것은 본래의 상설전시도 기본적으로 가진 고민이었을 것이다. 통사 성격인 조선실과 어떻게 차이를 둘지 고민한 것은 ‘한양의 역사’와 ‘조선시대의 역사’가 쉽게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정치사적으로 중요한 일들이 한양에서 주로 발생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래서 기존 상설전시실은  ‘공간’을 중심으로 서울을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북촌과 남촌, 중촌, 성저십리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있었던 주요 사건이나 예로 들 만한 사람을 소개하는 식으로 전시가 구성되었다. 



지금 상설전시실에 있는 한양도성 안 마을. 상설전시실의 이야기 중 기본이 된다.




내가 받은 오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상설전시실 개편이 언급된 것은 내가 올린 기안문에서부터 비롯됐다.

아마도 그 전부터 고치고 싶으셨지만, 말할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한 관장님이 내 문서를 계기로 말을 꺼내신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상당히 억울(!)했다. 입사 2년차도 안 된 때였기 때문이다. 2년차인데 내가 무엇을 안다고 왜 나한테?! 라는 마음이었다 할까. 

입구의 ‘한양 목각 지도’를 위해 시작된 자문회의는 상설전시실 개편 자문회의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자문회의를 위해 한 주는 관장님과 하는 자문회의 준비 회의, 그 다음 주는 자문회의, 또 관장님과 자문회의 준비 회의, 이후 자문회의. 이런 패턴으로 6개월을 소요했다. 

처음 자문회의 준비 회의(!)에서 오더 받은 것은 한양에 살던 사람들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논문이나 책, 관내 유물들을 토대로 우리가 전시할 수 있는 유물들과 관련 인물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내가 작성한 자료를 보시고는 관장님이 이걸로는 회의를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 선생. 회의를 2주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이 자료를 자문위원들에게 보여주기는 너무 빈약한데.”

 나는 아니라고 지적 받으면 오기가 생기는 사람이다. 다음 회의 자료는 ‘이런 말을 하실 수 없게 만들겠다!’라고 다짐했다.

기록이나 논문은 물론이고, 웬만한 준호구란 준호구는 다 뒤져서 사람들의 주거지를 표시했다. 
 
보다 보니 한양은 양반들도 쉽게 살 수 없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벼슬이 있을 때는 도성 내에 살 수 있었지만, 벼슬이 없을 때는 바로 도성 밖에 나가서 살 정도로 집값이 비쌌다.

한편으로는 각 집안이 주로 산 세거지들도 볼 수 있었다. 윤두서 집안은 한양 동쪽에서 살았는데, 벼슬이 없을 때는 해남 쪽으로 가서 살다가 벼슬살이를 할 때는 본인들의 집안이 갖고 있는 동쪽 땅에서 살았다.

‘중촌’이라는 개념도 진짜인가 하며 의심했지만, 준호구를 보면서 ‘오 정말 중촌에 이런 사람들이 주로 살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나름의 경향성이라는 것이 있긴 하네 싶었다. 


원래 엮어내려던 것 

사람들이 산 곳들을 찾고 나니, 이들로 각 지역 이야기를 꺼내보자고 관장님이 말씀을 꺼내셨다. 이를테면 그동안 우리는 북촌, 남촌 등을 이야기하면서 여기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고 예시를 드는 정도였지만, 이것을 거꾸로 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했을 때, 상설전인데 너무 옴니버스식 전시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으나 일단 하라고 하면 해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부하 직원의 덕목(!)이니, 순서를 다시 잡아보았다.(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2년차는 관장님에게 상설전이 이렇게 옴니버스식으로 가도 될까요 하다가 눈빛 공격을 당했다...)

문제는 특정 인물로 전시를 꾸려 나가려면, 그 인물과 관련된 유물이 있어야 하는데 100% 연관된 유물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자문위원 중 한 분이 제발 고정 관념 좀 깨라고 말씀하셨다.

박물관 전시가 꼭 유물로 채워야 하냐고. 현대 미술로 채워도 되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영조 초상화가 없으면, 유화로 그려도 되잖아.’ 이런 말씀이셨다.

그 외에 사운드나 냄새로 각 시기의 이미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말씀 등등도 있었다. 


엎어져버린 전시 

이렇게 6개월을 소요했으나, 전시는 엎어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쓰진 않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상설전시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렵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획전시를 고민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신경이 쓰인다. 고민해야할 지점이 훨씬 많다!) 이전에는 몰랐으나 준비하면서 기존 상설전시에서 고민한 부분들을 알게 되었다. 

전시는 엎어졌지만, 그래도 남은 것은 전시실 입구 ‘한양 목각 모형’이다.

14세기 한양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이야기된 목각 지도는 본래 소 달구지 소리와 농촌 냄새(!)와 함께 보여주자고 이야기가 되었지만, 지도만 남게 되었다.

어쨌거나 이때 많은 것을 배우긴 했는데, 2년차가 아니라 몇 년 지나서 준비했었다면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 상설전시실을 준비하라고 한다면, 많은 지점에서 고민을 해 볼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자신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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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사람들로 보는 한양(2): 한양에는 군인이 얼마나 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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