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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3

증폭해서 살려 본 벽초와 육당 동시대를 살다간 춘원과 달리 벽초 홍명희와 육당 최남선은 좋은 사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이 두 사람 연구에 일대 장애가 되고 있는데 ai 도움을 빌려 거지 같은 해상도를 살리고 다시 포토샵 기능 일부를 가미해 최대한 복원해 봤다. 일부는 왜곡 논란을 부를 수도 있지마는 최신 기술을 응용하면 거지 같은 저 거인들도 더 생생히 다가 온다. 이상 홍명희다. 이상 최남선이다. 2024. 2. 17.
강영훈과 육당 최남선, 그리고 만주국 건국대학 21대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姜英勳, 1922~2016)은 평북 창성 사람이다.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군 생활을 한 것이 인연이 돼 그는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주영대사, 국회의원, 국무총리 등을 지낸 것은 예편 후의 일이다. 현역군인 시절 강영훈의 기개는 남달랐다. 6군단장 시절에 4.19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 중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이 내려오자 그는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이를 거부했다. 1961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그는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였다. 이 일로 그는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무관 출신인 강영훈이 육당 최남선과 각별한 사.. 2023. 3. 8.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세 아들의 '흔적'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최헌규(崔獻圭)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창선(昌善), 국무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두선(斗善)은 동생이다. 여형제로는 손위 누이가 둘,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육당 집안은 제법 부유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 근무하며 한약방을 경영한 그의 부친 최헌규는 중국과의 한약재 무역과 농사 달력 판매로 큰돈을 벌었다. 육당이 출판업을 시작한 것은 부친의 재력 덕분이었다. 육당은 12세 때인 1901년 4월 현정운(玄晶運)의 6녀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2녀 4남을 두었는데, 이들의 생몰 연월 및 신상은 아래와 같다. 육당의 세 아들 이름의 끝자(인-웅-검)는 환인-환웅-한배검에서 따온 듯 하다. - 장녀 한옥(漢玉) : 1909년 5월생 (19..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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