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을 살다간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남긴 저작 중에 신변 잡담이나 시화(詩話) 등을 자유롭게 논한 글로써 ‘櫟翁稗說’이란 것이 있거니와, 현존하는 고려시대 문헌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데다, 그것이 후대, 특히 조선시대 문한(文翰)에 끼친 영향이 다대한 까닭에 한반도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막강한 듯이 평가된다. 그래서 각종 국문학 혹은 한문학 개설서에서도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거니와, 우리에게 흔한 발음이 ‘역옹패설’이니, 하지만 ‘櫟’이라는 글자를 ‘역’이라 읽는다 해도 그것은 두음법칙이 적용된 까닭이니, 엄밀히 ‘역옹패설’이라 한다면, 그 본래적 발음은 ‘력옹패설’쯤이어야 할 것이다.
櫟翁稗說에 대해 이제현 스스로 그 저술 내력을 다음과 같이 서문으로 붙여놓았다.
지정(至正) 임오년(壬午年)* 여름에 비가 달포를 이어 내렸다. 문을 닫고 지내니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도 없어 답답함을 떨칠 수 없었다. (이에) 벼루를 가져다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고는 벗들과 더불어 오고간 편지 조각들을 잇고 나서 그 종이 뒤에 여러 가지를 적고 그 끝에 책 이름을 ‘櫟翁稗說’이라 붙였다. 櫟이라는 글자가 (소리를 표시하고자) 樂이라는 글자를 쓴 까닭은 소리 때문이다. 하지만 재목감이 되지 못하면 베어지는 피해를 멀리할 수 있으니, 나무로서는 즐거워할 일이라 해서 ‘樂’이라는 글자를 쓴 이유다. 내가 일찍이 벼슬아치로 있다가 스스로 그만두고서 못남을 지키면서 별호를 櫟翁이라 하니, 그것은 재목감이 되지는 못하지만, 능히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서 그랬다. 稗라는 글자가 卑라는 글자를 쓴 까닭은 소리를 표시하기 위함이다. 뜻으로 그 글자를 살펴 보건대 稗는 벼[禾] 가운데서도 낮은 것이다. 내가 어려서는 글을 읽을 줄을 알았으나 장년이 되어 배우기를 그만뒀다가 이제는 늙고 말았다. 돌이켜 보니 자질구레한 글을 즐겨 써 놓았으니 알차지 못하고 비천함이 稗와 같다. 그러므로 그 적은 놓은 글을 稗說이라 한다. 중사(仲思)가 序한다.
至正壬午, 夏雨連月, 杜門無跫音, 悶不可袪, 持硯承簷溜, 聯友朋往還折簡, 遇所記, 書諸紙背, 題其端曰, 櫟翁稗說. 夫櫟之從樂, 聲也. 然以不材遠害, 在木爲可樂, 所以從樂也. 予嘗從大夫之後, 自免以養拙, 因號櫟翁, 庶幾其不材而能壽也. 稗之從卑, 亦聲也, 以義觀之, 稗禾之卑者也. 余少知讀書, 壯而廢其學, 今老矣. 顧喜爲駁雜之文, 無實而可卑, 猶之稗也. 故名其所錄, 爲稗說云.
*至正 壬午 : 고려 충혜왕(忠惠王) 3년, 서기 1342년에 해당한다.
**仲思 : 이제현(李齊賢)의 字이다.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櫟'이라는 글자를 수록하면서, 그것을 설명하기를 "木也. 从木, 樂聲"이라 했으니, 이 구절을 풀면 "나무다. 木이 뜻을 표시하며, 樂으로 소리를 표시한 형성자다"라는 정도가 된다.
한자가 생성되는 원리를 모두 6가지로 나눈 허신은 개중 하나로 뜻 글자와 소리 글자를 짬뽕한 글자를 형성자로 설정하면서, 이런 형성자는 거의 예외없이 저에서 보듯이 '从A, B聲'이라는 식으로 글자를 풀이했다. '从'이라는 글자는 從이라, 저 구절을 문자 그대로 풀면, "A를 따르며, B가 소리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저런 표현을 나는 대개 번역할 때면, A가 뜻이며, B가 소리인 형성자다" 정도로 푼다. '从木, 樂聲'이라는 구절을 내가 "木이 뜻을 표시하며, 樂으로 소리를 표시한 형성자다"라고 내가 풀어 쓴 이유다.
이에 의한다면, '櫟'이라는 글자는 나무 종류로서, 그 소리는 '樂'이 되어야 한다. 본래 허신이 설문해자를 편찬할 당시에는 반절법이 개발되지 않아, 형성자에 대한 소리는 저런 식으로 표시했다.
한데 저리 되면 골치 아픈 문제에 봉착하니, '樂'이 음이 뭐냐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 글자는 현재 한국에서는 세 발음이 있으니, 즐겁다는 형용사, 혹은 즐기다는 동사일 때는 소리가 '락'이며, 음악이라는 명사를 지칭할 때는 '악'이고, 좋아한다는 뜻일 때는 '요'로 발음한다. 비록 세 가지 발음이 있지만, 그 공통분모는 있어 요컨대 즐거움이 그것이다.
한 글자를 두 가지 이상으로 발음할 때, 그 공통분모가 있으면, 관습에 따른 구별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전연 그 의미에서 공통분모가 없거나, 그런 흔적을 찾기 힘들 때면, 애초에는 각기 다른 글자였다가, 후대에 한 글자로 합쳐진 때가 많다. 대표적으로 방언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예컨대 金이라는 글자가 있어, 같은 글자를 두 지역에서 사용하지만, 그 의미와 소리가 전연 다르게 사용되다가, 후대에 무슨 이유로 통합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한 글자가 전혀 다른 소리, 전연 다른 의미를 띠게 될 때는 거의가 방언이 통합된 데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현이 말하는 '櫟'이라는 글자는 저들 세 가지 발음 중 어디에 가까운가? 그 발음을 명확히 이제현이 표시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문맥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한데 이제현이 말하는 문맥을 보면, 櫟을 세 가지 樂 중에서 즐긴다, 혹은 즐거워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의한다면, 이 경우 櫟은 소리가 '락'이며, 그에 의한다면 櫟翁稗說은 '락옹패설' 정도가 된다. 하지만 현대의 그 어떤 이도 저것을 그리 표기하지 않고, '역옹패설'이라 한다. 이는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현대 표기법 때문이거니와, 두음법칙을 버리면 '력옹패설'이다. 두음법칙을 허용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력옹패설'이라 표기한다고 안다.
그렇다면 '櫟'은 왜 발음이 '락'이 아니고 '력'이 되었을까? 이것이야말로 알 수가 없다. 같은 소리를 표시하는 같은 글자가 들어간 형성자라 해도, 문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발음 표시는 같아도, 현대 중국어를 보면, 성조가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역사성 때문일 것이다. 문자도 그 자체 무수한 변화를 겪게 되거니와, 그런 과정을 거쳐 애초에는 같았을 발음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 한편으로는 문자가 태동한 시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애초에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른 소리인데, 편의상 그 소리를 표시하는 문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그 비슷한 소리들을 하나의 문자로 표시하는 일도 얼마든 가능하다. 이른바 편의에 따른 임시방편이다. 이 임시방편이 굳어져서 어떤 글자가 탄생하기도 한다.
허신 시대에는 반절을 통한 발음 기호가 발명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발명된 이후에 그것을 해설한 각종 주석본들은 이후에는 반절로써 표시하기에 이른다. 櫟이라는 글자를 보면 빠르면 당대, 늦어도 宋代에는 '郎擊切'이라는 반절 발음기호가 붙는다. '郎'과 '擊'을 절반씩 떼내어 붙인 발음...그래서 이런 발음 표시를 반절이라 하거니와, '郎랑'에서 앞대가리 자음 'ㄹ'을 떼내고, '擊격'에서는 앞대가리 자음을 제외하고 남는 다른 부분 '역'을 붙여서 읽으면, 결국 저 글자 발음은 '력'이 된다. 후대에 나온 각종 발음 자전들을 보면 아예 저 글자 음을 '歷'으로 달기도 한 일이 많다.
櫟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문제가 같은 稗說 중 稗에서도 발생한다. 이제현은 저 글자 역시 형성자로 보았으니, 하긴 이는 이제현 독자의 발명이 아니라, 이미 설문해자에서도 '禾別也。从禾卑聲。琅邪有稗縣'라고 풀었으니, 저 대목은 "벼의 일종이다. 禾가 의미, 卑가 소리인 형성자다. 낭야에 패현이라는 고장이 있다"는 뜻이다. 이에 의한다면, 그리고 이제현 설명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稗'는 '피' 정도로 발음 표시해야 타당하다.
한데 이제현은 櫟과 稗 두 글자가 형성자임을 똑똑히 알았지만, 실은 저들 두 글자를 회의자로 설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회의자가 무엇인가? 간단히 설명하면 두 글자를 합쳐서 전연 새롭게 만들어낸 글자다. 櫟을 나무 중에서도 재목감이 되지 못해서, 나무꾼들에게 베어짐을 면하게 되니, 이것이 기쁜 일이라 했다거나, 벼 일종이기는 하나, 그에는 수준이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품종이라 해서 稗라고 한다는 대목이 바로 이제현이 이 글자들을 어거지로 회의자로 보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한다.
뭐, 이는 자기 책 제목에다가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고육지책의 발동이다.
각설하고 현대 표기법과 한자자전들을 동원하면 櫟翁稗說은 '력옹패설'이며, 두음법칙을 적용하면 '역옹패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것이 곧 이제현 시대의 고려시대 발음이라고 우리가 장담할 수도 없다. 그 시대 정확한 발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들의 발음을 녹취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櫟翁稗說을 ‘낙옹비설' 혹은 '낙옹피설'로 읽는다 해서, 썩 잘못이라 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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