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묘권墓券에 등장하는 '安厝登冠大墓안조등관대묘'와 관련해 내가 기존 말도 아니되는 주장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신설新說을 발표하기는 2009년 8월이었다. (安厝登冠大墓는 安厝 / 登冠 / 大墓 라고 끊어 읽는다.)
당시 나는 이런 새로운 주장을 담은 논문을 <百濟 武宁王陵의 ‘登冠大墓’ 再考 : 동시대 中国과의 사례 비교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을 붙여 부산대 중국연구소가 발간하는 기관지 《CHINA연구》 7호에 게재했다.
관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대묘大墓는 왕릉이 아니라 가족 공동묘지다.
둘째, 따라서 그 앞쪽 등관登冠은 그 공동묘지 이름이다.
(그 앞에 붙은 '安厝안조'는 복합동사로 '安置'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저 말은 무령왕(의 시신)을 당시 백제 왕실 부여씨 가족공동묘지 혹은 종족공동묘지인 등관 이라는 곳에 안치했다는 뜻이다.
조금 전 심심하던 차에 논문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등관대묘'라는 키워드로 관련 논문을 검색하니 놀랍게도 저 논문이 나온 이후로 오로지 이 문제만 천착한 전문 논문이 아래 2편이 추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장수남, <백제 무령왕릉 지석의 ‘安登冠大墓’ 재해석>, 《역사와 담론》 59, 호서사학회, 2011. 8
여병창, <武寧王陵 ‘安厝登冠大墓’ 解釋 再考察>, 《중국인문과학》 56, 중국인문과학회, 2014. 4
각중에 웬 등관대묘 논문이?
애니웨이 그 두 논문을 다운로드하고는 대강 훑었거니와, 역시나 이들 두 논문은 그들이 내 주장에 호응했든 아니했든 내 논문에 격발되어 쓴 것임이 명백했다.
한데 이상한 점은 대묘가 가족공동묘지라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그 앞 등관登冠은 고유명사라는 내 주장을 반박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이게 뭐야?
덧붙이건대 大墓가 가족 공동묘지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나는 유종원을 통해 증명한 것이 아니라, 도홍경을 통해 증명했다. 두 논문이 모조리 내가 무령왕릉보다는 연대가 200년가량이나 떨어지는 유종원을 근거로 저리 주장한다.
나는 무령왕릉과 거의 똑같은 시대 중국 남조 양나라 지식인 도홍경의 저술, 그 중에서도 眞誥를 깡그리 뒤져서 그 시대에 大墓가 가족공동묘지임을 밝혀냈으며, 아울러 그 이전 시대 위진남북조시대 묘지명에서도 관련 쓰임을 찾아 증명했다.
(January 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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