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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조선시대 미라

개간, 산림파괴, 말라리아 (2)

by 초야잠필 2019.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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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개간, 산림파괴, 말라리아 (1)편 


구한말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로 알렌이라는 분이 있다.  Full name은 호러스 뉴턴 알렌 (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고 미국 사람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신시내티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의료선교를 자원하여 처음에는 중국 선교사로 상하이로 들어갔지만 이후 조선으로 선교지를 바꾸어 우리나라로 들어와 활동하였다. 북장로교 선교사이다.   


이 분은 한국 근대 의학사에서 여러모로 논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한 양반인데, 이번 연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쓰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가장 오른쪽이 알렌. 


알다시피 우리나라 의과대학 중 역사가 오래된 두 개 대학에 서울 의대와 세브란스 의대가 있다. 

이 두 학교 전신을 이루는 대학은 일제시대에는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 그리고 세브란스 의전이었다. 


해방이전 세브란스 의전은 해방 이후 연희전문과 합쳐져 우리가 잘 아는 오늘날의 연세대로 이어졌다. 


서울의대 설립은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이 합쳐지면서 탄생했다. 

당시 미군정은 일제시대 여러 대학을 모아 국립서울대로 재편 하면서 다른 단과대학에 대해서도 개편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아는 “국대안 파동”도 있었다. 


어쨌든 두 학교 모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사립 의과대학으로서 지닌 역사도 길고 해방 이후 수많은 의료인을 배출하여 한국 의학계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최근 들어 서울의대와 세브란스 의대는 각각 “뿌리 찾기”에 돌입 했다. 왜 뿌리 찾기인가... 사실 20세기 초반 36년간 일제의 통치를 겪은 우리는 뒤늦게나마 이러한 류의 조상 찾기의 혼란이 드물지 않으니 이 부분은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먼저 세브란스 병원 쪽 주장을 보면 이 쪽은 그 병원의 시작을 구한말 제중원으로 보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 


조선정부와 미국 선교사가 힘을 합쳐 운영한 복잡한 성격의 정체성에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간섭을 피해 조선정부가 아예 선교사에 운영 전권을 줘버리는 통에 이 병원이 어디로 그 전통이 이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막대한 혼란을 낳았다.  



제중원은 조선(대한제국) 정부의 지원이 있었기는 했지만 미국 선교사-의사들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운영 되다시피 하여 상당한 자율성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 경영권이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에 이관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전통이 나중에 설립된 세브란스 병원으로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 사이에는 상당한 연속성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세브란스 의대와 병원의 기원에 대해 기술한 거의 모든 출판물에는 세브란스 병원/의대까지 이어지는 과정의 첫머리에 제중원을 올려놓았다. 




제중원을 경영하던 미국 선교사-의사로부터의 전통을 강조하는 세브란스 병원



반면 서울대 병원/의대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 경성제대 의학부-경성의전의 합병으로 탄생했지만 이 두 학교 합병에만 그 연원을 두지 않고 국치 이전 대한제국 시기의 “대한의원”까지 거슬러 올려 보고자 하였다. 즉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설립했던 국립대병원으로서 해방 이후 서울대 병원과 같은 위상이었다 보고 학교 전통의 맥을 여기서 찾고자 했고 이에 따라 대한의원의 전신인 제중원까지 연원이 자연스럽게 소급 된 것이다.   




서울대 병원이 보는 개항기 국립병원 계통도. 


1907년 대한의원의 전신이 광제원, 제중원까지 이어지므로 서울대 병원의 역사는 제중원까지 소급된다는 주장이다. 1899년 설립된 의학교의 직접적 후신이 서울의대 설립 시 합병 당사자 중 하나인 경성의전이다. 서울의대의 경우 전신이 경성제대 의학부만 있었다면 일제시대 이전으로 소급시키는 것이 상당히 고민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경성의전이 서울의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일본인이 졸업생 중 더 많은 숫자였던 경성제대 의학부와 달리 경성의전은 졸업생이 조선인이 더 많았고 그 연원도 국치 이전으로 소급되어 대한제국 의학교로 연결되므로 이런 계통도가 가능해 지는 측면이 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일부에서는 서울의대가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의 합병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의전이 의학부를 흡수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반면 아래쪽 미국북장로회-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어지는 계통이 바로 세브란스 병원이 주장하는 제중원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이 계통도는 서울대 병원측의 주장이므로 상대적으로 이쪽 주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 조선정부의 제중원이 미국북장로회에 "위탁운영"되었다가 "환수"되어 인연이 끝났고 그 전통은 대한의원으로 이어진다고 표시하였다.  



오늘날 서울대 병원 구내에는 아주 오래된 병원 건물이 하나 남아 있다. 이것이 “대한의원” 건물이다. 이 건물은 많은 사람이 일제시대 총독부병원 건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고 의외로 병원 건물 자체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7년에 완공된 것이다. 





서울대 병원 구내의 "대한의원" 건물. 현재는 의학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 순종의 명으로 세웠던 대한병원 건물은 현재도 계속 복원 중이다.




서울의대와 세브란스 의대 당사자들 입장을 요약해 보면 우리나라 최초 의료기관인 제중원은 구한말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병원으로 한국사에 막대한 의미가 있는 기관인데 이 기관 후예라고 자처하는 병원과 학교가 우리나라에 둘인 셈이다. 실제로 이 두 병원 관계자들은 최근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서 한치 양보도 없어 때때로 당사자들간 격렬한 설전을 벌이곤 한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이번 연재 내용과 큰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두 학교 모두 연원을 지금까지보다 더 위로 소급 하는 과정에서 위에 언급한 알렌이라는 인물과 만나게 된다는 점만 기억해 두자. 


알렌은 원래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평안한 시대였다면 어렵게 사는 나라에서 의료선교를 한 선량한 인물로 기억될 사람이었지만, 당시는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의 난세였던지라 이 양반의 한국 생활 역시 그리 평탄 하지는 않았다. 


이 분은 한국에 온 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경각에 달한 민영익의 목숨을 구한 뒤 그 의술의 수준을 높게 평가 한 고종의 배려로 제중원 (처음에는 광혜원)을 말하자면 “위탁경영”하게 되었다. 


각설하고-. 


알렌과 그 동료들이 제중원을 조선정부 의뢰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 1885년. 


그 후 1년 동안 병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알렌은 제중원 개원 1주년이 되었을 때 (1886년) 그 동안의 환자 통계를 모아 보고서로 출간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이다. 




알렌의 1886년 제중원 내원환자 통계 보고서. 

의사학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진 보고서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의 도움을 얻어 운영한 병원이므로 알렌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을 했다 할수도 있겠지만 이때 그가 편찬한 보고서는 당시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이후 우리 근대 의학사에서 막대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 보고서야 말로 수천년 한국사에서 사상 최초로 근대적 의학 진단 기법에 따라 달성한 환자 통계였기 때문이다. 


이 통계가 발간됨으로써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질병통계가 나오기 이전, 대한제국시대 당시 질병 상황을 우리가 어렴풋이 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일년동안 그와 동료들이 접한 환자들의 진단명을 꼼꼼히 분류하여 기술하였고 이를 통계 처리하였다. 이 보고서를 보면 당시 내원 환자 중 진단된 질병의 상대적 비율까지 알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알렌의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실린 외래환자 진단명 통계. 

황상익의 "근대의료의 풍경"에서 전재.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당시 가장 진단이 많았던 질병에 대한 기술이다. 


알렌의 통계에 의하면 1896-1897년 당시, 일년 간 대한의원에 내원하였던 환자는 총 1만명 정도 되었는데 발열 환자 중에 가장 많이 진단 되었던 질병이 말라리아였다. 알렌의 기록을 보자. 


"말라리아는 가장 흔한 질병으로 4일열 (four-day ague)이 가장 흔하다...." 


"치료한 질병 중 가장 흔했던 것 가운데 한가지가 다양한 종류의 말라리아였는데 모두 1061례를 진료하여 전체 환자의 대략 10분의 1 (11 퍼센트)을 차지했다. 이러한 환자들은 전국 도처에서 찾아왔으며 500리나 떨어진 곳에서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상 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 


알렌이 진단한 말라리아 환자는 전체 내원환자의 10프로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이다. 


여기서 알렌이 말한 4일열이라는 것은 말라리아 감염 때 보이는 특이한 증상 중 하나로 고열이 72시간 마다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틀은 멀쩡하다가 그 다음 날 격렬한 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말라리아에는 4일열만 있는 것은 아니다. 3일열 말라리아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하루건너 한번씩 (48시간 마다) 열이 올라가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진단 기법이 잘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열이 끊임없이 지속되지 않고 일정 시간 간격을 두고 발작적으로 체온이 올라가는 현상이 보이는 것이야 말로 말라리아 감염 진단에 있어 빠뜨릴수 없는 중요한 임상 증상이었다. 체열의 이러한 패턴에 주목하여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단한 알렌의 노력은 당시로서 타당하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은 말라리아 환자 아닌가? 

과연 알렌이 기록한 이 엄청난 수의 환자가 모두 "진짜 말라리아 환자"였을까? 


황상익은 이 부분에 대해서 4일열 말라리아가 있다고 기록한 알렌의 보고에 주목한다.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전체 발열 환자 중 4일열 환자가 713명으로 62퍼센트, 3일열 환자가 171명으로 15퍼센트로 4일열 말라리아 환자가 압도적인데 문제는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3일열 말라리아가 많았지 4일열 말라리아는 토착병으로 거의 보고되지 않다시피한 것이다





알렌보고서의 내용. 4일열 말라리아 (Quartan) 가 가장 많이 진단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이 4일열 말라리아가 임상적으로 우리나라는 거의 보고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반면에 3일열 (tertian)은 확실히 말라리아였을 것이다. 


황상익의 "근대의료의 풍경"에서 전재. 




황상익은 조선시대라고 해서 20세기와 다른 말라리아가 창궐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 이상 알렌이 4일열 말라리아라고 기록한 것은 실제로는 말라리아가 아닌 것을 그렇게 오진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3일열 환자만 확실한 말라리아 환자로 남게 되는 셈인데 전체 발열 환자의 15퍼센트 정도가 확실한 말라리아 환자인 셈이다. (근대의료의 풍경). 


여인석 역시 황상익과 같은 이유로 알렌이 말라리아가 아닌 것을 말라리아로 진단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라리아 이외의 다른 열성 질병 중에 말라리아처럼 일정한 주기성을 갖고(특히 4일을 주기로) 열이 나는 질병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알렌의 질병통계에서 사일열 환자를 말라리아가 아닌 것으로 간단히 배제하기에는 여전히 미심쩍게 보았다. (여인석, 학질에서 말라리아로)


황상익 여인석 두 의사학자가 생각하듯이 알렌 기록의 희귀성에도 불구하고 1897년 당시 실제 조선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로 말라리아가 유행하고 있었는지 그 상태를 이 기록만으로 우리가 정확하게 짐작하기란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알렌이 활동하던 당시 그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서 조선사람들 사이에 발열을 유발하는 첫번째 이유로 이 질병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 사회에 말라리아가 만연하였던 것 하나 만은 사실이었다 할 것이다. 


알렌은 "서울의 위생상태에 대한 의사 알렌의 보고서 (1885)"라는 글에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이처럼 좋은 기후에서 말라리아가 크게 창궐하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쪽 지역을 제외하고 나라 전체에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한다. 모든 종류의 말라리아가 발생한다." (여인석, 알렌의 의료보고서)


이를 보면 어쨌건 19세기 후반 당시 조선 민중의 건강을 위협하던 질병 중 말라리아는 가장 쉽게 눈에 띄던 감염증이었던 것은 분명하며 환자에게 열이 있을 때 의사가 그 원인 중 첫번째로 떠올릴 수 밖에 없는 흔한 질병이었던 것 하나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계속)


*필자 주: 오늘 글 쓴 부분에서 제중원에 관한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의 입장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첨예하다. 이 글에서 필자는 되도록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세브란스 병원의 입장을 취재 차 같은 의대 "동은의학박물관"을 방문했을때 불행히도 마침 그날 그 박물관이 놀았다. 이 때문에 전체 글의 분량에서 서울대 병원의 주장이 좀 더 많이 실린 감이 없잖다. 후일 적절한 세브란스측 자료를 더하여 공평하게 보완할 것을 약속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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