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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귀주대첩] (13) 노복 터진 강감찬

by taeshik.kim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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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빌빌 쌌다. 948년, 고려 정종定宗 3년에 태어난 그는 빌빌 싸다 서른여섯 중늙은이가 다 된 983년, 성종成宗 2년에야 최승로崔承老가 시험감독관 총대장이 되어 실시한 과거 시험 갑과甲科에 강은천姜殷川이라는 본명으로 등단해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나이에 견주어 출세는 굉장히 늦어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주장하는 조정 대세에 맞서 홀로 몽진을 주장해 관철함으로써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도 계속 빌빌 쌌다. 이렇다 할 요직을 지낸 적도 없다. 

이런 그가 역사의 주역으로 등단하기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전운이 한창 감돌던 그 무렵, 현종은 지난날 몽진, 곧 일단 튀고 보자 전법을 제시한 강감찬을 기억하고는 그를 서경유수로 임명하고, 나아가 서북면을 지키는 총사령관으로 삼음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그것도 주역으로 등단했으니 이때 이미 나이 70이었다. 

내일 죽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고령. 이런 그가 느닷없이 전쟁 총사령관이 되어 거란군을 참혹하리만치 대파했으니, 이제부터 강감찬한테 하늘이 허여한 절대 명령은 오래 살라! 딱 이것이었다.

그는 이제 노후를 즐기면 됐다. 나라를 구한 전쟁 영웅, 하도 받은 상이 많아서 집안엔 트로피가 넘쳐났다. 

귀주대첩을 이룩하고 귀환한 그를 맞이하고자 현종은 버선발로 교외 역까지 마중나가 대대적인 환영 퍼레이드를 벌인 데 이어, 개경으로 귀환해서는 공식 만찬을 한 번 더 했다. 

1019년 2월, 강감찬과 강민첨, 그리고 이번 승리 일대 주역 김종현 등을 초빙한 대대적인 연회가 명복전明福殿에서 펼쳐졌다.

이런 열기가 식을 즈음 강감찬은 마침내 명예퇴직원을 제출한다. 저 승리가 있은지 딱 두 달 뒤인 1019년 4월, 이제 저는 나이도 많고 하니 물러날낍니다. 허락해 주이소 하고 쓴 표문을 올린다.

하지만 그리할 수는 없는 법. 보통 이럴 때 하는 수법이 궤장几杖이라 해서 의자랑 지팡이를 하사하는 일이니, 강감찬도 그랬다. 

사서에서는 누락되었지만 틀림없이 궁궐을 들락거릴 때는 허리를 굽히지 말도록 하고, 임금을 알현할 때는 이름을 대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또 정무는 매일 출근하지 않는 대신 재택 근무를 원칙으로 하면서 예컨대 5일마다 한번씩 사인만 하면 된다 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많은 트로피, 그는 봉준호를 능가했다.

같은해 11월 이 할배는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00호[檢校太尉 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 食邑三百戶]에 봉해진다.

이름이 열라 길다는 건 그만큼 얻은 게 많다는 뜻이다.

식읍 삼백호란 삼백호 마을을 통째로 이 할배한테 주고서는, 그쪽에서 나는 소출은 당신이 다 무라! 라는 뜻이다. 물론 다 먹을 수는 없다. 일정 부분은 왕실이나 조정에 바치고 나머지 삥을 뜯은 것이다. 


경기도박물관 이경석 궤장. 강감찬도 이런 걸 받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다음달 또 트로피 하나를 추가하는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恊謀安國功臣이 된다.

뭐 충을 다 바치고 같이 협력 모의해서 국가를 평안케 한 공신이다 이런 뜻이다. 포상금도 당연히 따라겠지만 사서에는 누락됐다. 한 몫 또 땡긴 것이다. 

다만 이런 조치들은 보통 퇴직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고려시대는 특히 더 그랬다. 왜 퇴직에 즈음해 봉작을 높여주는가?

퇴직금 때문에 그랬다. 보통 퇴직한 관료한테는 현직 때에 견주어 그 절반을 녹봉으로 지급했다. 당연히 퇴직 당시 직급이 높을수록 땡기는 연금도 많았다. 

이렇게 해서 내보내야 궁시렁거림이 없다. 

상노인 중 상노인이 된 강감찬은 1020년 6월에 마침내 명예퇴직원이 받아들여져 공식 퇴임하는데, 이때 일흔셋이었다.

그냥 보낼 수는 없어 현종은 그를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500호[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 食邑五百戶]를 더한다. 이로 보아 천수현天水縣 일대에 봉지가 있었음을 안다.

그 전 식읍 300호도 아마 천수현이었을 것이다. 이 천수현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혹 진주강씨 문중 자료에 편린이 보일지는 모르겠다. 

이후에는 각종 호사를 누리며 진짜로 탱자탱자한 삶을 보낸다. 그에게 축복은 열라 오래살았다는 사실이다. 

1030년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물경 여든셋이었다. 이젠 그만 죽어줬으면 했지만 안 죽으니 현종은 또 그해 5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준다.


국립민속박물관 꽃상여



내가 말했자나? 신라시대 상대등 x도 아닌 명예직이요 꿔나논 보릿자루이며, 실은 원로 대우용이었다고. 신라사 하는 놈들이 이런 것도 모르고 상대등이 무슨 대단한 자리인양 설레발을 친다. 

문하시중으로 일했겠어? 그냥 국보위 고문 같은 자리라 수당만 챙기고 법카만 썼다. 

이 분이 이듬해 1031년 5월에 사망하신다. 여든넷. 김유신보다 무려 다섯살을 더 사셨다. 그가 죽자 국상으로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현종은 명령을 내린다. 

모든 관원은 그가 무덤에 묻히는 현장을 참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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