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이 1971년 수립하고, 이듬해에 본격 추진하기 시작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한국고고학 지형을 바꿔 놓았으니, 다른 무엇보다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국가주도 발굴이 확실한 우위를 점거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고고학 발굴은 그 규모나 건수에서 미미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나마 그런 미미한 발굴은 국립박물관이 시종 주도했고, 몇몇 대학에서도 그 나머지를 농가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주관광개발계획은 그 양대 축이 보문관광단지 개발과 경주 시내 신라유적 정비였기에, 특히 후자와 관련해 대대적인 국가주도 발굴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추진을 위해 문화재관리국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사적관리 분야 총설계자 정재훈
범정부 기구인 이 종합개발계획은 시종일관 청와대가 주도했고, 건설부와 문공부, 그리고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축을 이뤘으니, 문화부에서는 관광단지 개발 전반과 유적관리 분야를 전담했다. 문화재관리국은 그것이 생겨날 적에는 일본의 교육위원회처럼 교육부 산하 외국이었지만, 문공부로 넘어갔던 것이니, 이 계획이 입안 추진될 무렵에는 문공부 산하였다.
경주관광개발종합개발계획단에는 경주 지역 유적 관리를 위한 전담 기구가 1973년 3월 28일에 출범하거니와 '문공부 경주사적관리사무소'가 그것이었다. 현판식은 73년 6월 13일에 있었다. 사적관리사무소 출범에 이어 그해 4월 16일에 천마총이 개토제를 하고, 그해 12월 4일까지 발굴작업이 이뤄졌는가 하면, 천마총 발굴이 중반 지점을 지난 그해 6월 5일에는 황남대총이 들어가 75년 10월 28일에 공식종료한다.
천마총 발굴현장을 찾은 박정희
1973년 내내 발굴을 통해 내부가 드러난 천마총은 한국고고학이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고고학이 특히 정권 홍보차원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하게 보여주었으니, 그에 어울리게 천마총에서는 각종 화려찬란한 유물을 쏟아냄으로써, 화려찬란한 고대문화를 보여주는 일대 획기였다.
고고학을 넘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경주로 향할 적에, 그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경주사적관리사무소를 못내 부러운 듯이 바라보면서, 이러다간 자칫 우리의 존재감조차 망실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젖은 사람들과 기관이 있었다. 경주사적관리사무소는 문공부 산하라 했지만, 실제는 문화재관리국이 운영 주체였고, 더욱 정확히는 1969년 출범한 문화재연구실이 주축이었다.
그 연구실 초대 실장에는 국립박물관 고고과장으로 일하다가 스카우트된 김정기였다. 그가 국립박물관에서 문화재관리국으로 옮길 적에 박물관장 김재원은 물을 먹었다. 그 자신도 인사가 나기 전까지 까마득히 모른 상태였으니, 생전 김정기 증언을 보면 이 일로 얼마나 김재원이 열을 받았던지, 한동안 김정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국립박물관 지키기에 나선 김재원
이래저래 열이 받아있는데, 그렇게 훌쩍 떠난 김정기가 천마총이니 황남대총이니 해서 저 거대한 신라고분들을 한창 파제끼고, 더구나 그에 대한 대통령 박정희의 관심 역시 지대했으니, 그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무엇보다 당시까지만 해도 박물관보다 한껏 아래로 봤던 문화재관리국이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니, 위기감 역시 다대했다. 이러다간 박물관 존재 기반 자체가 흔들릴 판이었다.
천마총 발굴을 종료하고, 황남대총 발굴이 한창 진행되던 1974년, 참다못한 김재원이 마침내 칼을 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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