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김춘추 아들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김인태金仁泰

by taeshik.kim 2024. 1. 13.
반응형

태종무열왕 김춘추한테는 아들이 많아 적자로는 훗날 문무왕이 되는 맏아들 법민法敏을 필두로 문왕文王(혹은 文汪)·노차老且·인태仁泰·지경智鏡·개원愷元이 있고 서자로는 개지문皆知文·거득령車得令(차득령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마득馬得이 있다. 

딸은 여기서는 논외로 친다. 

저들 적자 중 인태를 빼고는 모조리 김유신 아랫누이 문희 소생이라, 문희한테 행운은 딸이 있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으나 모조리 아들만 줄줄이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건 요새도 출산 패턴을 보면 분명한데 우리 엄마처럼 아들딸 고루 낳는 여인도 있지마는, 아들만 줄줄이 낳는 사람, 딸만 줄줄이 낳는 사람으로 대개 갈린다.

우리 장모님은 따님만 줄줄이라, 지금은 없는 따님까지 포함하면 아들 없이 따님만 다섯을 내리 낳으셨다. 

문희는 김춘추 정실이라 그에서 난 아들들이 당연히 적자이라, 그렇지 아니한 첩의 자식들과는 신분이 현격히 달랐으니, 적서 차별은 저 무렵에도 극심했다.

한데 문제는 저들 적자 중에서도 유독 인태仁泰만큼은 종자가 다르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언제나 나를 괴롭힌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태종춘추공에 의하면, 김춘추-문희 사이에서 난 아들로는 법민 인문 문왕 노차 지경 개원 여섯을 들면서 유독 인태만은 뺐다.

이를 액면 대로 취신한다면 인태는 엄마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이 인태가 문희 이전 조강지처 소생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인태가 어머니가 다름에도 그가 적자 혹은 적자 대접을 받았음은 분명한데,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에 이르기를 재위 2년(655) 봄 정월에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으면서 나머지 아들들은 문왕은 이찬으로, 노차老且는 해찬海飡으로, 인태는 각찬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은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서자한테 재상 자리를 줄 수 없는 까닭이며, 이는 곧 인태가 적자이거나 그렇게 취급받았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문무왕본기 7년(667) 조에 이르기를 이해 가을 7월에 당과 신라가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면서 당 고종이 유인원과 함께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를 지나 평양에 군사가 모이도록 하는가 하면,

이듬해 고구려를 멸망할 때도 결국 출전은 못했으나 대각간 김유신이 총사령관을 맡은 신라군 진영에서 인태는 이찬으로서 비열도총관이라는 넘버 2에 해당하는 고위직 장군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해 고구려를 정벌하고 고구려 포로 20만 명을 이끌고 이세적이 중국으로 귀환할 적에 인태는 형인 각간 김인문을 따라 중국으로 갔다. 

저런 고위직을 역임하는 것으로 보아 김인태는 명백히 적자다.  

이보다 앞서 인태는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를 정벌할 때도 신라군 수뇌진에 포함되어 신라군 7천 명을 이글고 웅진에 주둔한 현지 사령관이었다. 

적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다.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김인태 엄마는 누구란 말인가? 왜 삼국유사는 적자임이 분명하지만 유독 인태만은 그 엄마가 문희라는 사실을 적기 하지 않았을까? 

어찌된 셈일까?

이걸 어느 누구도 물은 적이 없다.

왜?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