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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4편 고려 충숙왕 시대의 쇼생크 탈출 - 금마군 무강왕릉 도굴범, 감옥을 탈주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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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 시간은 016년03월02일 14시00분이다. 

 

이 《독사일기》 맨 처음에 나는 원나라 공주 눌륜의 무덤이 도굴된 일을 다루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이다. 한데 이보다 한 달 전에는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고려사절요》  충숙왕 해당 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馬韓) 조상 호강왕의 능을 도굴했다. (도둑을) 붙잡아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했지만 달아났다. 정승 정방길(鄭方吉)이 전법관(典法官)을 탄핵하고자 했지만 찬성사 임중연(林仲沇)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이 옥에 갇힌 지 2년이 되었지만 드러난 장물(贓物)이 없는데도 죽은 자가 많습니다”고 했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내가) 본래 무덤 판 놈들에게 금붙이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임중연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성을 냈다.  

 

이를 세심히 훑어보면 뭔가 이상한 대목이 있음을 직감한다. 왕릉을 도굴한 일과 체포한 일 그리고 도굴범의 탈주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마치 한 시점에 일어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도무지 이런 일련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탈주 사건 처리를 두고 두 관리가 다투는 와중에서 나온 말을 보건대, 도굴 사건 범인으로 체포된 자들이 무려 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문맥으로 보건대 도굴범(들)은 확정 판결을 받고 소위 기결수로서 수감 생활을 한 지 2년 만에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 셈이다. 따라서 앞 기록만으로는 호강왕릉 도굴 사건 발생 시점이 3월인지, 아니면 탈주 사건이 3월인지 판가름하기가 심히 곤란하다. 다만, 전후 맥락으로 보아 발생이 이해 3월인데, 관련 기록을 한 군데에다가 몰아넣다 보니 조금은 복잡하게 정리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무강왕릉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 중 대왕묘
무강왕릉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 중 대왕묘 (사진제공=차순철)

 

앞에 등장하는 전법사는 글자 그대로는 법을 관장하는 관청이라는 뜻이니 요즘으로 치면 경찰서나 감옥 정도로 보아 대과가 없다. 전법관은 그것을 담당하는 관리를 말하니 경찰관이나 교도관 중에서도 총책임자에 해당한다. 나아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많이 죽었다는 자가 도굴 공범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 간접으로 연루된 이들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래도 공범들을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호강왕릉 도굴은 단독범 소행이 아니라 대규모 도굴단이 저지른 셈이 된다. 

 

한데 탈주 사건을 두고 정승 정방길과 찬성사 임중연이 치고받는 대목이 영 수상쩍은 느낌을 준다. 이에 따르면 전법관 처벌을 주장하는 정방길은 도망친 도굴범들이 진범임을 확신하면서 그 증거로 그들이 금붙이를 많이 갖고 있음을 들었다. 그 반면 임중연은 그들이 도굴범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맞선다. 2년 동안 수감해 놓고 족쳤지만, 그들이 훔쳐냈다는 장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탈주 사건은 묻어두자고 한 것이다. 이로 볼 때 이 도굴 사건 배후에는 임중연 혹은 그가 뒤를 봐주어야 하는 모종의 인물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방길이 묻어두자는 임중연을 호되게 몰아붙인 이유는 이 사건 배후에 다름 아닌 임중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 사건도 그렇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눌륜공주 무덤 도굴 사건 역시 발생 시점이 고려가 원나라의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피식민 상태였고, 그에 따른 각종 중앙 정부 권력이 한창 이완된 시기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 무렵 민생은 파탄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러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살 길을 찾아 도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 중에서는 연대별 사건 일지로서 그 자체만 보면 《고려사절요》와 같은 편년체인 세가(世家)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앞에 나온 정방길의 행적을 정리한 그의 열전에서 이 사건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정방길은 과거에 급제하고는 여러 벼슬을 거쳐 판전교사(判典校事)가 되었으며, 지금의 국립대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다가 밀직사(密直司)로 들어갔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당하자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민천사(旻天寺)라는 사찰에다가 모아놓고는 원나라 황실에 글을 올려 왕을 환국시켜 달라 요청하는 한편 고려를 무고한 자들을 체포해 압송해 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그 뒤에 정방길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무강왕(武康王)의 묘를 도굴하다가 잡혀 전법사에 수감되어 있던 도적들이 탈옥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방길이 전법관을 탄핵하려 하니, 찬성사 임중연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들을 2년이나 억류했지만 장물이 드러나지 않았고 죽은 자도 많다”고 했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도굴범들이 금붙이를 많이 지니고 있음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거제(巨濟)의 전조(田租. 토지에 물린 세금)를 남몰래 쓴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임중연을 향해 여러 차례 모욕을 주니 임중연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병이 있다고 하면서 사직해버리니 사람들은 정방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당시 정방길의 나이가 일흔여섯이라 왕이 지팡이를 내려주고 김태현(金台鉉) 대신에 권행성사(權行省事)로 삼았다. 

 

이를 보면 확실히 《고려사절요》 관련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다. 나아가 임준연이 이 탈주 사건의 실질적 배후임을 이제는 여실히 알 수 있다. 임준연이 도굴범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앞선 정방길 바로 뒤에 붙은 그의 열전을 보면 아무래도 이들에게서 뇌물을 받은 듯하다. 

 

임중연은 일찍이 의랑(議郞) 조광한(曹光漢), 응교(應敎) 한종유(韓宗愈)와 함께 인사 행정[銓注]에 참여했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장백상(蔣伯祥)과 함께 섭정동성사(攝征東省事)를 지내기도 했다. 충숙왕이 임중연을 꾸짖기를 “그대가 나의 정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임권(林權)이라 지목한다”고 했는데, 정권(鄭權)이라는 자도 일찍이 인사 행정을 맡아 뇌물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왕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충숙왕이 말한 임권이란 바로 임중연과 정권이다. 나는 정방길의 논박을 볼 적에 아무래도 호강왕릉 도굴단도 임중연이 조직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나 확실한 점은 도굴단을 탈주케 한 배후는 임중연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도굴된 무덤을 《고려사》는 무강왕릉(武康王陵)이라 하고, 《고려사절요》 에서는 호강왕릉(虎康王陵)이라 하지만, 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는 무강왕릉이지만 왕건의 아들로 고려 2대 왕인 혜종은 이름이 무(武)인 까닭에 그 이름을 함부로 쓰지 못해 호강왕릉이라 했을 뿐이다. 이를 피휘(避諱)라 한다. 두 역사서는 모두 조선 초기에 나온 까닭에 ‘武’라는 글자를 ‘虎’자로 바꾸어 쓸 필요가 없었지만, 이를 알아챈 《고려사》는 본래 글자로 돌린 반면, 《고려사절요》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후자의 편찬진이 조금은 더 게으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무강왕릉이 무엇이며, 그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 호를 기약하기로 한다. 참, 앞에서 나온 그 무덤 소재지 '금마'란 현재도 지명이 남았거니와 전북 익산시를 금마면 일대를 말한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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