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시대에 속한다는 합의만 있을뿐 그 존속 연대에는 논란이 적지 않다.
물론 어떤 유적이 한 시기에만 있다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 송국리 유적은 이른바 복합유적에 가깝고 존속기간도 꽤 되는 듯하다.
아무튼 이 문화 무덤 문화를 대표하는 1호 돌널무덤 연대를 어찌 보았는가 궁금해서 살피니 기원전 9~5세기로 설정해 놨더라.
연대, 곧 이른바 편년에 그리 매달리는 한국고고학에서 청동기시대 무덤 하나를 두고서 이렇게 연대폭을 넓게 설정하는 일을 나는 듣도보도 못했다.
그만큼 논란이 많다는 정도로 보아 넘기자.
그 어떤 경우건, 다시 말해 기원전 9세기건, 기원전 5세기건 저 시대 한반도 금속문화 양상을 보면 실상 거지라, 청동기가 극히 일부 사용되었다 하지만, 거지나 진배 없는 돌삐족이다.
근자 화천 천전리인가? 정선 아우라지인가 하는 데서 기원전 11세기? 12세기로까지 올라가는 청동제품이 나왔다 하지만, 꼬라지 보면 처참하기 짝이 없어 구슬 같은 쪼막디 몇 점에 지나지 아니한다.
물론 저쪽 북쪽은 그 전개가 상대적으로 매우 빠르지만, 한반도 중남부를 기준으로 할 때 청동기다운 청동기 시작은 기원전 4~3세기가 되어서야 가능하며, 실상 그 이전은 말이 청동기시대지 무슨 청동기?
그런 청동기 공백 시대에 저 비파형동검이 떡 하니 나와 주니, 그 강림을 소원한 한국고고학이 얼마나 반색하겠는가?
이 한 점으로 한국고고학은 특히 일본 고고학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으니, 간단히 요약하면 그래 봐라! 니들이 우리는 청동기가 없었다지만 봐라! 떡 하니 나왔자나? 이러고도 까불래? 딱 이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상 송국리 유적이 유명해진 이유는 딱 이 하나였다. 일본을 향한 삿대질, 일본을 향한 반박, 이것을 가능케 해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일본도 구체로 보면 아리미스 교이치 유광교일有光敎一이라는 듣보잡 고고학도였다.
왜?
이 듣보잡이가 한반도는 청동기 문화는 없다는 소리를 한 까닭이다.
더 웃긴 건, 그렇게 타도 아리미쓰를 외친 한국고고학이, 더욱 구체로 좁히면 국립박물관 고고학이 물경 104살인가로 사라질 때까지도 아리미쓰라면 죽을 때까지 사족을 못 썼다는 사실이다.
거의 추앙에 가까운 존경을 다한 까닭이다.
저 송국리에서 일본을 빼면?
할 말 없다.
이것이 한국고고학 처참한 현실이다.
맹렬히 일본만 향해 달린 참사다.
저들한테 세계고고학은 곧 일본고고학이었다.
세계를 향해 발신해야 할 한국고고학이 오로지 일본고고학을 보고 달리다 거지꼴 난 셈이다.
쏘리. 이 얘기하려 아니었음에도 얘기가 길어져서 일단 예서 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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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송국리] (2) 거지 같은 도판 집어치고 칼을 묻다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5%87-680
[다시보는 송국리] (2) 거지 같은 도판 집어치고 칼을 묻다
새로 개장한 국립중앙박물관 선사실이 그래 부여 송국리 유적이 여러 모로 중요하다 해서 그 자체, 나아가 이를 통한 한국선사시대 문화를 부각하려 한 노력이야 가상하다만 그 이해를 돕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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