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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도굴당하고 복구하고, 기구한 무덤의 팔자, 이규보가 증언하는 도굴

by taeshik.kim 2021.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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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페친인 김 모 선생님께서 일찍이 고려 왕릉의 도굴상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동국이상국집>에도 고려 중기 왕릉의 도굴과 관련되는 자료가 나타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요조하신 현비賢妃의 옥체를 매장한 지 겨우 1백 년이 지났는데, 천유穿窬의 소도小盜가 금품을 훔쳐 냄이 구천九泉에까지 미쳤나이다. 이에 위태롭고 두려운 생각이 겹쳐 완전한 수리로 복구하기를 도모하고, 먼저 정성의 제물祭物을 베푸오니 밝게 들으시기를 우러러 아룁니다.

간릉簡陵이라는 능을 수리하기 위해 태묘와 경령전에 알리는告諭 글이다. <고려사>에서는 간릉을 산직장상散職將相 둘이 지키는 능 중 하나로 언급할 뿐 주인을 알 길이 없는데, 여기서 그 주인을 '현비'라고 한 걸 보면 문종의 비인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씨가 아닐는지?

'천유'라는 표현을 보니 도굴꾼이 굴을 파서 무덤방에 들어갔던가보다. 그러니 무덤이 무너지게 되고, 그 수리를 위해 고유문을 쓴 것이다.

이런 글이 <동국이상국집> 안에 4~5건이나 나온다.

재밌는 것은 그냥 흙이 무너져 수리하려 할 때는 송악산과 여러 신사神祠에 고유하고, 도굴당한 게 확실할 때는 태묘와 경령전에 고유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흙이 무너진 것은 토지와 기후의 문제이니 산신에게 아뢰야 하고, 도굴은 영혼이 잠들어계신 방에 잡인雜人이 들어오는 것이니 그를 사죄드려야 하는 게 맞겠다.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보고를 보면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이 협박하며 시키지 않으면 결코 도굴을 하려 들지 않았었다고 한다. 심지어 무덤 밖에 동검 같은 게 나와 있어도 절대 가져가지 않았다던가.

이를 두고 '땅에 떨어진 현대 윤리와 대비되는 구舊 조선의 도덕' 같은 소리를 한 학자도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심지어 고려 사람도 왕릉을 도굴할 정도였(성행했다고까지는 못하겠으나)는데, 조선시대에는 과연 없었을까. 매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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