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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

모욕을 주려거든 침을 뱉고 술을 따르게 하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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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년, 고구려 왕실에서 권력투쟁에 패한 온조가 건국한 백제는 서기 660년 음력 7월 18일,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하니,

이 장면을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해당 일자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18일에 의자義慈가 태자太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는 웅진성熊津城에서 와서 항복했다.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来降.

 

앞서 의자는 부여 사비성에 웅거하다가 나당연합군이 밀어닥치자 7월 13일, 좌우 측근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줄행랑을 쳐버리니,

사비성에는 아들 융隆과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이 남아 협상을 통한 돌파구를 기대했던 듯하거니와, 혹 사비성이 무너진다 해도, 이른바 정부를 분산함으로써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던 듯하지만, 사태는 그가 기대한 대로 전개되지는 아니했다. 

사비성에 남은 백제군은 의자가 웅진으로 도망한 그날 맥락없이 무너졌으니, 이 대목 신라본기 기술은 다음과 같다.

 

13일에 의자의 아들 융隆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니, [신라 태자]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는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동생을 억울하게 죽이고는 감옥에다 묻은 일이 있어 나는 이 때문에 20년이나 마음이 아프고 머리를 썩히다가 오늘 네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니 융은 땅에 엎드리고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패배에는 굴욕이 따르는 법. 이제나저제나 승전 소식이 이르기를 금돌성今突城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마침내 7월 29일 소부리성所夫里城에 입성했다.

백제 왕궁에 신라 왕이 입성한 것이다. 자랑스런 승자로서 말이다. 

공식 승전식은 사흘 뒤인 8월 2일에 있었다. 전쟁을 벌인 장병들은 거나한 술이 내려졌다. 이 승전식을 신라본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왕과 [소蘇] 정방(定方 및 [나당연합군] 여러 장수가 대청마루에 좌정하고는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에 앉힌 채 때로는 의자한테 돌아가며 술을 따르게 하니, 좌평佐平을 비롯한 백제 뭇 신하로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王與定方及諸將坐於堂上, 坐義慈及子隆於堂下, 或使義慈行酒, 百濟佐平等羣臣, 莫不鳴咽流涕.

 

이로 보아 얼굴에 침을 뱉거나, 술을 강제로 따르게 하는 일이 당시로서는 치욕을 안겨주는 일이었음을 추찰한다. 


이에서 주목할 대목이 침을 뱉은 사람과 그 뱉음을 당한 사람 지위다. 뱉은 사람은 신라 태자이며, 당한 사람은 의자왕 아들로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소부리성을 지키던 위수사령관이었다. 

법민이 나선 이유는 체통 없게 왕 김춘추가 나설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그런 그가 고른 상대가 의자가 아니라 왕자 융인 까닭도 현장에서 일어날 소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을 짙게 한다. 

이 백제 정벌전쟁에 신라가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는 그 출진 진용을 보건데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걸었음을 확인하거니와, 첫째 왕이 직접 출전했고 둘째, 태자까지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백척간두 같은 전쟁에 왕이 친정하는 일은 심심찮게 있지만, 태자까지 동반하는 일은 없다. 

태자나 왕 둘 중 한 명은 모름지기 수도 서울에 남아있어야 하는 법이니, 그것은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당시 신라 수도 계림에는 누가 머물며 계엄사령관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칫하면 왕과 태자 모두 몰살하는 사태가 있을 수 있으니, 그런 중책을 맡을 유일한 인물이 김유신이었지만, 그는 신라정벌군 총사령관으로 그 역시 직접 출정한 상태였다. 

아마도 김춘추한테 여러 아들이 있었으니, 그런 아들 중 한 명 혹은 복수를 명목상 계엄사령관으로 내세우고는 노련한 장군 겸 재상 누군가가 호위케 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우리는 당시 유수사령관 이름을 알 수 없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 목을 치고. 통구12호분 고구려 고분벽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침뱉기가 대단한 모욕이었음을 보았거니와, 같은 삼국시대 역사에서 저런 다른 사례 하나가 검출되니, 바록 475년 한성백제 멸망의 순간이다.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21년(475)에 백제는 멸망하는데,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3만 대군에 왕성이 패몰하고 왕을 비롯한 백제 지휘부가 몰살한다.

이 장면을 백제본기는 이리 묘사한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 대로對盧 제우齊于ㆍ재증걸루再曾桀婁ㆍ고이만년古尒萬年<재증과 고이(古)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해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 장수 걸루桀婁 등이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본디 백제 사람인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한 사람들이다.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 戕之. 桀婁·萬年夲國人也, 獲罪逃竄髙句麗.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백제에서 어떤 죄를 얻고는 고구려로 도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그들이 고구려 정벌군에 합류해 각종 정보를 제공했음을 엿본다. 

이들로서는 얼마나 분이 상했는지, 자신들을 내친 개로왕을 향해 얼굴에 침을, 것도 세 번이나 거푸 뱉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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