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kakaocdn.net/dn/m4q00/btqXZHvSMNr/pQpELyGIjiuLPnDcOYA3bk/img.jpg)
수위 조절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은 기고문이 나왔다.
올해가 문무왕 수중릉 발굴 오십주년이라 해서 신동아 의뢰로 관련 글을 초해봤다.
동아일보에서 일하다가 이 잡지로 파견나간 권재현 기자가 좋은 자리를 주선했다.
1967년 5월 16일 한국일보는 문무왕 수중릉인 대왕암을 발견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 직후 다른 신문도 같은 보도를 했지만, 엄밀히 이는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이었다.
![](https://blog.kakaocdn.net/dn/AjbXy/btqX6hpltrq/NdG4S5BkV3KZKelti7bxzK/img.jpg)
그렇다면 무엇으로써의 재발견인가?
지금의 대왕암이 문무왕 수중능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고려시대 이래 죽 그랬다.
나는 문화재로서의 재발견이라고 본다.
수중릉은 자연히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에다가 문화재라는 가치를 주입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은 소위 발견 직후인 1967년 7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을 가능케 한 동인이 1967년 5월 15일 대왕암 직접 조사였다.
![](https://blog.kakaocdn.net/dn/QySic/btqX33kzHuk/YOAukrzeUslA5FT6hv0Ck0/img.jpg)
한국일보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이 대왕암으로 가서, 정영호 선생을 포함한 3명이 빤스 바람으로 장대 들고서 바닷물로 뛰어들어 깊이를 쟀다.
장대가 한없이 들어가니, 대왕암 한가운데 바위 밑에는 암혈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암혈이 문무왕 혼령이 드나드는 용혈로 간주했다.
그러고선 모식도를 그렸으니, 그것이 아래 사진이다.
![](https://blog.kakaocdn.net/dn/HYZVU/btqX810QlaX/5IH2M5oqk7Ly0ffsIxh1F1/img.jpg)
이를 토대로 해서 대왕암은 문무왕 해중릉으로 재발견되고 당당히 극일의 표상으로써 당시 시대정신을 충실히 구현한 기념물로 재발견되었다.
이 과정은 한국 내셔널리즘의 표상 그대로다.
이후 시간이 다시 흘러 2001년 역사스페셜이 진짜로 바닷물을 막고 파헤졌더니, 뿔싸, 대왕암은 우리가 생각한 그 대왕암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내가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의 고충도 감안해야 했으며, 그 시대정신을 찬양하거나 동조하지는 못할지언정 고려는 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면 아래로 최대한 숨기면서 그런 대로 하고 싶은 말은 했다고 본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아! 이렇게 해서 나는 또 하나의 신비를 벗겼을까?
모르겠다.
(2017. 2. 21)
***
문제의 기고문이다.
발견 50주년 문무왕 수중릉은 실재인가 신화인가?
발견 50주년 문무왕 수중릉은 실재인가 신화인가?
발견 50주년 문무왕 수중릉은 실재인가 신화인가? 김태식 |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3월 호 2001년 4월 28일 오후 KBS 역사스페셜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편을 시
historylibrary.net
아래 글도 참조하라.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 이 글은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가 발간하는 소식지인 《박물관소식》 2002 3․4호에 ‘특별기고’ 형태로 투고한 글 전문이다.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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