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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민립대 설립운동을 다시 본다

by 초야잠필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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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일제 식민지사에서 민립대 설립운동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 

그 중요성에 비해 현재까지 이 운동의 시작과 실패는

조선인이 대학을 만들려고 했는데 일제가 방해해서 실패했다. 끝. 

이 정도 설명에 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대학의 문제가 조선과 일본의 30년대 이후 차별화의 모든 근간이나 다름없다. 

차별은 개인의 편견에 의해 주어 질때는 그다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차별이 구조화해서 재생산 되게 되어 있을 때가 무서운 것이다. 

일제시대 후반부의 조선인 차별은 그런 식으로 구조화했기 때문에 무서운것 인데 그 구조화의 바닥에는 조선땅의 고등교육의 부재가 있었다. 

이 부분을 재검토하여 전모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설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연희전문의 대학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두 가지만 쓰겠다. 

첫째는 1920년대 연희전문의 대학승격이 성사되었다면, 

1930년대 후반에는 연희대학에서 조선인 교수가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인 교육의 가장 문제점은 조선인의 대학원교육, 교수요원으로 훈련하기 위한 학교가 전무했다는것인데, 

이렇게 되면 전문학교 이상의 교원은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1940년대 해방 때까지도 대부분의 전문학교에는 일본인 교수가 태반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는 1920년대 대학승격이 이루어졌다면, 

해방이후 서울대 개교 때 상황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서울대 개교시 교원으로 영입된 사람 중에는 필자가 아는 한 학사위도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박사호가 있는 사람도 없었다. 법대전체에서 박사학위자는 딱 둘이었다고 하니까. 

이 부분의 의미가 잘 안 알려진 것 같다. 

국내에 대학이 없는 상태에서 해방이 되면, 대학교수는 전원 해외대학 졸업자와 경성제대 졸업자. 딱 둘이 주류가 된다는 이야기다. 

만약 1920년대 이후 조선인 사립대학에서 안정적으로 대졸자가 배출되어 나오기 시작했다면, 해방 이후 서울대 개교 때와 국대안 파동도 그 양상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실로 많은 부분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던 것이 조선인 대학의 설립 실패인데, 이 부분이 너무 피상적으로 연구되어 있어 모두의 분발을 촉구한다. 

릿쿄대 야구부 (1931년). 릿쿄대는 대학령으로 대학승격 당시 文学部(英文学科、哲学科、宗教学科)、商学部、予科가 있었다. 연희전문은 1917년에 개교하였는데 당시 이미 문과 상과 신과(神科) 농과 수물과 응용화학과가 있었다. 여기에 예과를 더해 6년제 대학으로 재편할 생각을 연전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연전이 4년제를 운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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