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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부여 회고, 강을 낀 낮은 땅을 선호한 백제

by 초야잠필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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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필자가 고기생충 연구 때문에 자주 내려갔던 동네다. 여기서 얻은 결과는 학술지에도 여러 편 출판되었다. 

부여 발굴 현장을 본 감회를 약간 써 보면, 

부여는 백제시대 물난리가 상당히 자주 있었던 동네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금강, 백마강이 감돌아 흐르는 부여 땅



기생충란이 화장실 터 뿐아니라 거주지 주변에서도 꽤 많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사실 이러한 징후는 물난리가 많은 도성지역에서 흔한 현상이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한양도성이 딱 그렇다. 

허구 많은 데 다 놔두고 왜 하필 저렇게 홍수가 많은 지역에 도읍을 정했는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풍납토성도 그런 데라 사비성만 탓할 일은 아니라 하겠다. 

백제가 망했을 때 일본에 있던 부여 풍이 귀국하여 풍왕으로 즉위하여 주류성에 머물렀는데 너무 외지고 험준한 곳에 있는 탓에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를 옮기는 장면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1], 에치노하타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3]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하타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낮은 땅에 강을 두르고 제방이 있는데 도랑을 터뜨리면 물이 쏟아진다니 풍납토성이나 사비성 그대로이니 백제라는 나라 자체가 그런 낮은 땅에 강을 낀 지형을 선호했음을 알겠다. 

 

부여에서 기생충 조사중. 함께 작업하던 단국대 김명주 교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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