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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살아가는 초대형 이벤트 불사佛事, 사리 영이기와 관세음 응험기가 결합한 1313~14년 고려 개경 국청사 불상 봉안기

by taeshik.kim 202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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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비교적 긴 글은 조선 초 사가정 서거정이 편집 주간을 맡아 완성한 거질 한국문학총서 동문선東文選 권 제68 기記가 저록한 민지閔漬(1248~1326)의

국청사 금당주불 석가여래 사리영이기 [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

라는 글 전문이라, 하나하나 음미해서 봐야 한다. 불교문학에서는 매우 흔한 사리영이기舍利靈異記란 간단히 말해 부처님 사리를 둘러싼 신이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본문에서 음미하면 드러나겠지만, 이는 역시 불교문학에서는 흔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이기도 하다.

관세음응험기란 관세음보살, 약칭 관음보살이 선사하는 신이한 행적을 기록한 글이라는 뜻으로, 가장 보편적인 기술은 없던 사리가 각중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거나, 혹은 사리 한두 개가 또 각중에 느닷없이 무한세포증식을 거듭해 여러 개로 갈라졌다는 골자다.

저 둘을 둘러싼 한국고고학 신이스런 사건이 근자에 거푸 백제 유적에서 있었으니, 전자 사리영이기는 익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할 때 드러난 백제 무왕 시대 사리 봉영奉迎을 둘러싼 사리장엄기이며, 후자 관세음응험기는 부여 왕흥사 터 목탑터에서 출현한 백제 창왕시대 사리장엄구가 있다.


왕흥사 사리장엄



특히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청동제사리합에는 6행 29자 글자가 있으니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곧 "정유년丁酉年(577) 2월 15일 불탄일에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을 세울 적에 2매였던 사리가 탑에다가 묻을 적에 신이로운 조화로 3매가 되었다"고 했으니, 밑에서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이 골자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바로 이 국청사 관세음응험기다.

이 글을 보면, 그와 같은 사리 조화를 부른 이가 흰 옷을 걸친 화상, 곧 관음보살임을 본다.

나아가 이 관세음응험기는 고려시대가 기록한 그것이라는 점에서 매우매우 중대한 증언이며, 나아가 불상 제조와 복장 안치 의식, 나아가 그것을 절로 이운하는 과정, 나아가 그에 즈음한 대웅전 낙성과 다시 그에 즈음한 각종 불교의식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글 하나는 삼국유사 전체와 맞먹는다.

불사佛事는 불교가 살아가는 이벤트였다. 이와 같은 불사를 통해 절과 불교계는 그 재원을 땡겼으니, 이는 지금의 불교계 그것과 눈꼽만큼도 차이가 없다. 돈을 담으려면 그릇이 있어야 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외가 있을 수는 없다.

민지 증언을 보면 불상 발원과 그 낙성, 그리고 이운, 그리고 대웅전 완공과 그에 따른 불상 안치 그 어느것 하나하나 불사 이벤트 아닌 것이 없다. 이런 이벤트 성공을 위해 대대적인 광고 홍보가 뒤따랐다. 이 광고 홍보는 불사의 성공을 판가름했으니, 이렇게 왕창 땡긴 재원으로 중들과 절과 불교는 명맥을 이어갔다.



왕흥사지 사리장엄



이벤트 성공을 위한 광고 홍보가 효율로 작동하는 가장 흔한 수법이 신이神異의 창출이다. 저와 같은 일마다 각종 신비로운 일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 창안이야말로 그 이벤트 성공의 절대 조건이었다. 민지가 저록한 저 이야기는 결국 신이담으로 점철한다.

고하노라! 땡기려면 이벤트를 할 것이며, 이벤트를 하려거든 홍보를 잘할 것이며, 홍보가 성공하려거든 신이담神異談을 창출하라!!!
푸른색 부분은 원문이며, 괄호 안이 내 평설이니, 본문보다 내 평설을 봐야 한다.


대개 왕도王道는 두 가지가 없으나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의 예악禮樂이 같지 않음은 만난 때가 혹은 다스려지고 혹은 어지러운 때문이고, 불승佛乘은 오직 하나이나 녹원鹿苑과 추봉鷲峯의 권실權實이 같지 않음은 기다리는 기회가 작고 큼이 있는 까닭이다. (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가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따르는 길 역시 둘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다른 까닭은 형편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왕人王과 법왕法王이 대대로 세상에 나오는 법은 비록 다르나, 그 혼일混一된 것으로 왕을 삼고 귀일歸一된 것으로 부처를 삼는 것은 또한 서로 멀지 않으니, 만일 풍토風土에 맞는 법으로 그 왕업을 돕는다면 어찌 병에 따른 좋은 약과 때에 맞는 단비와 같지 않으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왕과 불국토를 다스리는 부처님이 세상을 제도하는 근간은 같지만 형편을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옛적에 수隋나라가 장차 일어나려 할 때에 진陳나라와 제齊나라가 나란히 서서 천하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수나라의 지혜 있는 신하 주홍정周弘正이란 자가 문제文帝에게 권하기를, “들으니, 세 가지를 모아 하나로 귀일시키는 법문法門이 있는데, 이름이 묘법화妙法華라고 하니, 만일 이 법을 천태산天台山 아래 국청사國淸寺에서 넓힌다면 천하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자, 문제가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과연 통일이 되었다. (수 왕조를 창업한 군주 문제가 삼분한 천하를 불법, 특히 법화경을 중시하는 천태종으로써 하나로 만들었다.)

지금 이 동한東韓의 땅도 일찍이 삼분되었다. 그래서 우리 태조太祖가 창업創業하던 때에, 행군복전行軍福田 사대법사四大法師 능긍能兢 등이 글을 올리기를, “듣건대, 대당大唐 나라에 세 가지를 모아 하나로 귀일시키는 묘법화경妙法華經과 천태지자天台智者의 일심삼관선법一心三觀禪法이 있다 합니다. 성군聖君께서 삼한三韓을 합하여 한 나라로 이룬 것과 풍토가 서로 합치되니, 만일 이 법을 구하여 세상에 널리 행하도록 한다면 뒤를 잇는 용손龍孫의 수명이 연장될 것이고, 왕업도 끊어지지 않아서 항상 한 집안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후삼국 분열 와중에 왕건이 고려를 창업하자 천태종으로써 천하를 한데 아울러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그때에는 미처 구하여 그 계획을 후사後嗣에 끼치지 못하였으나, 선종宣宗 때에 이르러 왕의 아우 대각국사大覺國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구해 와서 비로소 천태육산天台六山을 세우고, 이어 땅을 송산松山 서남쪽 기슭에 정하여 절을 짓고 역시 국청國淸이라 이름하였으니, 육산六山의 근본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천태종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다가 대각국사 의천에 이르러 중국에서 그것을 들여와 그 도량으로 전국 6개 명산에 건립하되, 송도松都 인근 국청사를 그 본산으로 삼았다.)

석가삼존釋迦三尊을 세워 당주堂主로 삼고 항상 묘법妙法을 강연하게 하여 대대로 그 복택을 입었다. 국가가 중간에 비색하게 되자 절도 따라서 없어졌다. 중흥한 이래로 바야흐로 비로소 중건하기 시작하였으나 예전 터를 회복하지 못하여 의논이 상설像設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의천 당시 국청사 주불主佛은 석가모니라, 이곳에서는 항상 법화경을 강설했다. 하지만 이렇게 번성한 국청사도 형편이 다해 기능을 상실하고 아예 절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최근에야 그 터에다가 새로운 절을 세우고자 하는 여론이 일었다.)

이제 국통國統이 부처의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는 것을 슬프게 여겨 맹세코 힘을 다해 조성하려고 하자, 대선사 이안而安이 또한 백은白銀 10근을 희사하였으나,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이 중창 논의를 주도한 이가 국통이었고, 그 부름에 맞추어 이안이라는 사람이 막대한 자금을 밑천으로 내어놓았다.)



왕흥사지 목탑 사리공 인근 출토 공양품들



황경皇慶 2년 계축년(1313) 여름에 비로소 상호군上護軍 노우盧祐가 독실히 삼보三寶를 공경하고 또 일을 잘 주관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청하여 이 일을 부탁하고 또한 백은 10여 근을 주자 노공이 기꺼이 허락하고, 물에 돌을 던지듯이 하여 과연 한 달도 못 되어 성취하였으니, 높고 큰 금상金像이 땅 속에서 솟아나온 것 같아서 보는 자가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기부한 막대한 자금을 밑천으로 불상 제작을 노우 라는 사람한테 제공하니, 그가 한달 만에 뚝딱 이 훌륭한 불상을 만들어냈다.)

장차 배에 감추는 것[腹藏]을 안치할 때에 도인과 속인 10여 명이 그 집에 모였는데, 모든 물건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사리舍利가 여전히 없고 또 구할 만한 곳도 없어서 서로 대하고 탄식할 뿐이었다. (불상이 완성하자 그걸 제작한 사람 집에 승려와 신도 몇 사람이 모여 복장을 안치하는 의식을 논의했지만, 가장 중요한 복장 안치물인 사리가 정작 없어 이걸 우짜노? 웅성웅성했다.)

모인 가운데 신사信士 정천보鄭天甫란 사람이 있어서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지금 국통과 여러 시주施主가 하는 일이 만일 참된 선이라면 부처님의 사리를 어디서 구한들 얻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노우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즉시 항상 벽에 걸어 놓고 있는 백의白衣 화상 앞에 한 자쯤 되는 검은 비단을 펴게 하고 향을 피우며 3번 예를 하고 머리를 들어 보니, 이미 사리 한 개가 뚜렷이 나와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가만 있을 수만은 없다. 기돗발뿐이다. 기도해서 얻자! 독실한 신도 정천보가 제안하자, 그래 해 보자! 누가 할 것인가? 불상을 만든 노우가 집안 벽에 항상 걸어놓고 예불하는 관음보살을 향해 기도하자 어랏? 사리 하나가 떡 하니, 뿅하니 나타났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 뛰며 서로 가까이 가서 보니 굴릴수록 더 많아져서 드디어 수없이 많아졌는데, 그 빛이 여러 가지여서 푸른 것·흰것·검은 것·누런 것이 찬란하여 눈부셨다. 노우가 말하기를, “만일 붉은 것만 있으면 오색이 갖추어지겠다.” 하였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붉은 빛깔의 사리가 이미 나와서 연달아 네 개나 되었다. 이에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부처의 경지는 막힌 곳이 없고 공덕은 헛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와 놀랍도다 하면서 그 사리를 굴리니 세포분열을 시작해 네 가지 색깔 사리로 뿅하니 증가했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아! 하나마 더 있으마 오색영롱이 되는 건데...)


왕흥사지 목탑 사리공 덮개와 공양품들



국통이 이 말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장편 게偈를 지어 찬미하기를,

국청당 위에 삼존이 기이하니 / 國淸堂上三尊奇
문수와 보현이 석가모니를 모시었다 / 文殊普賢侍尼
누가 많은 인연을 모아 능히 이 일을 마련하였는가 / 誰集衆緣能辦此
상장 노공이 한 일이다 / 上將盧公之所爲
배에 감추는 여러 물건을 안치하려 하는데 / 腹藏諸物欲安置
사리한 물건만이 가장 구하기 어려웠네 / 一物最難求舍利
신사 천보가 노공에게 말하기를 / 信士天甫謂盧公
“선근의 참과 거짓을 시험할 수 있으니 / 善根眞僞斯可試
그대들 시주의 정성이 만일 지극하다면 / 君等檀家誠若至
사리를 빌어 얻기 무엇이 어려우리” 하자 / 乞得舍利胡不易
노공이 곧장 백의 앞에 나가 / 盧公卽進白衣前
비단을 펴고 향을 피우며 원하는 뜻을 말하였다 / 鋪帛焚香陳願志
물러나서 예를 세 번하고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 退禮三拜擧頭望
이미 한 개가 비단 위에 생겨나 있었다 / 已有一粒生帛上
여러 사람이 넘어질 듯 기뻐하여 다투어 다가가서 보니 / 諸人顚喜爭就看
잠깐 동안에 수없이 나타났는데 / 須臾出現無數量
오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빛은 반짝반짝 하였으며 / 五色爛斑光耿耿
형체도 크고 작고 같은 모양이 아니었다 / 體亦大小非一樣
수습하여 팔엽통에 나누어 담아 / 收拾分盛八葉筒
주와 반 삼존의 배 속에 넣어 안치하였다 / 納安主伴三腹中
듣는 자가 모두 희한한 생각을 가져 / 聞者皆生希有想
한참 동안 찬미하고 탄식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 / 彈指讚歎終莫窮
알겠도다, 이 상이 곧 진상이어서 / 須知此像卽眞相
겁화와 바람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 不畏劫火毗嵐風
무릇 한 티끌이라도 희사하여 경영을 도운 사람은 / 凡捨一塵助營者
어찌 삼계의 영웅이 되지 않으랴 / 安得不成三界雄

하였는데, 이는 사실대로의 기록이었다. (오호 이런 신이함이라니? 이 사업 대빵 스님 국통이 가만 있을 수는 없어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시를 지어 부처님을 찬송했다. 석가모니 부처님 혼자만 모실 수는 없어, 이때 그를 시봉하는 두 보살로 문수 보현보살까지 함께 만들었는데, 사리는 팔각 통에다가 각각 나누어 담아서 부처님과 두 보살 복장으로 넣었다.)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장식운모



내가 이 금상을 구경하고자 노공이 사리를 빌던 곳에 가 보니 바로 저자 변두리 누추한 집이어서 시끄러운 티끌과 더러운 기운이 사면에서 서로 모여 들었다. 이 속에서도 이처럼 신령스러운 상서가 나타났으니 이것은 참으로 부처의 힘이 불가사의한 것이다. 일찍이 경(經) 속에 말한 것을 보면, “법신(法身)은 허공(虛空) 같고 법계(法界)는 곧 여래(如來)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도다. (이런 신이한 일들을 당신 같은 글쟁이가 멋드러지게 만들어주라! 한 턱 내마! 원고청탁 받은 나 민지가 현장 답사는 해 보고 써야겠기에 직접 그 현장을 가서 봤다! 사리가 나타난 노우 집은 송도 번화가에서 벗어난 변두리였다. 이런 데서 부처님 신이가 나타나다니)

만일 법신과 허공이 동체同體가 아니어서 때도 안 끼고, 깨끗하지도 않고, 간 것도 없고, 온 것도 없는 것이라면 지금 이 사리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또 색色과 공空이 두 가지가 없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구별이 없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알지 못하거니와 느껴진 정성이 유독 노우와 정천보 두 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인가. 또한 처음 서원誓願을 발하고 재물을 바친 곳에도 있는가. 나는 생각하기를 북에 비유하면 가죽·나무·북채·손 네 가지가 구비된 연후에야 능히 그 소리를 발하는 것이니, 이것도 혹은 가죽과 나무 같고 혹은 북채와 손 같아서 함께 성취한 것이리라. (아무것도 없는 데서 사리라는 물건이 나타났으니 열라 신이한 일이지만, 가만 생각하면 두 사람 기돗빨이 하도 간절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배 속에 감추는 것[腹藏]이 이미 원만해지고 장엄莊嚴이 벌써 끝남에 이르러 날을 가려 의식을 갖추고 연우延祐 원년 갑인년(1314) 겨울 11월 12일에 이 절에 봉안하려 하니, 국통이 손에 향로를 잡고 불상 앞에 서서 걸어 나와 성문에 이르렀다. 나도 부름을 받아 이 행차에 따랐는데, 이때에 바람과 날씨는 온화하고 따뜻하여 마치 봄과 같았다. (복장까지 한 불상은 길한 날을 잡아서 노우 집에서 옮겨와서 국청사에 봉안하게 되니, 어랏? 이때도 천공이 있었구만? 부처님 봉안할 적에 오야붕 스님이 병향로를 잡고 인도하며 성대한 의식으로써 했다.)



왐흥사지 목탑터 공양품들



불상이 이미 들어가 안치되니 또 공운供雲을 갖추고 특별히 훈석熏席을 열었다. 이튿날 아침에 오안五眼을 점찍으려 하니 홀연히 상서로운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서설瑞雪이 이리저리 날리고, 법연法筵을 막 파하니 날씨가 청명해졌다. (한 말씀 없을 수가 없는 오야붕 스님, 판 깔아 일장 훈시하시고, 그 다음날에는 부처님 눈동자를 그리려는데 어랏? 또 신이한 현상이 나타나네? 이 따뜻한 봄날에 상서로운 기운이 깔리고 눈발까지 날리다니?)

국통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제 불상을 옮기려고 시일을 정하고 나서 두려운 것이 풍설이었는데 이제 개었으면 하고 바라면 개고, 눈이 왔으면 하고 바라면 눈이 내리니, 이것도 한 신령한 응험應驗이다. 만일 며칠 전에 능히 사리를 이르게 한 일을 보고 또 오늘 개고 눈 내리는 것이 약속한 것 같이 되는 모양을 본다면 이 좋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우리 임금을 장수하게 하고 우리나라를 복되게 하는 것도 기도하며 축원하는 것처럼 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록하라.” 하였다. (국통이 나한테 말했다. 니 봤제? 어찌 기록해야 할지?)

내가 재주가 부족하고 붓이 무디었으므로 굳이 사양하였으나, 마침 그날에 입사入社한 여러 분이 각각 일로 말미암아 한 분도 온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양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대신하여 대충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바치었다.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이 자리에 초대되었으나 모조리 쌩깠다. 왜? 글쓰기 싫어서다. 불쌍한 나만 남았다가 덤터기 쓰게 됐다.)

이듬해 을묘년(1315) 봄에 국통이 이전에 지어 바친 기記를 반복하여 자세히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날 강승회康僧會는 실로 천하에 뛰어난 중으로 그가 사리를 빌어 청한 것은 본래 그 큰 법을 일으키려 한 것이고, 또 오왕吳王의 위엄 있는 형벌에 받으면서도 그 무리와 힘을 함께하고 정성을 합하여 빌어 청하였으니, 정성이 전일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진精進하기 21일이 되어 기한이 다되어도 응험이 막히므로 다시 죽을 힘을 다하고 또 하룻밤을 지낸 뒤에야 한 개를 얻었는데, 지금 빌어 청한 자는 승회의 적수도 아니고, 함께 참여한 사람도 오합지중이다. 이미 기일을 약정한 부지런함도 없고 또 형벌로 핍박하는 두려움도 없는데, 겨우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나타난 신령한 응험이 저것보다 백배나 된 것은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 실상實像이 모셔야 할 장소가 아닌 곳에 임시로 모셔져 있으니 내가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하고, 다시 노공에게 청하기를, “이제 그대와 내가 반드시 전생의 인연이 있어 함께 불사佛事 짓기를 이미 이와 같이 한 것이다. 또 원하건대, 그대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원本願을 창립하고 아울러 감실龕室과 금강대金剛臺를 만들어서 이 실상을 봉안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였다. (사람 욕심 끊이 없는 법. 이런 신이한 일까지 일어나 예까지 이르렀으니, 이참에 더 해 부치자. 노우 자네 말이야. 부처님만 만든 일로 만족하지 말고 재능기부 좀 하지? 부처님을 임시로 모시기는 했지만, 영 꼴이 말이 아냐. 감실이랑 금강대도 좀 만들어줘 잉)



왕흥사지 목탑터 공양품들




그 말이 간절하고 눈물도 흘리니 노공이 앞으로 나오며 말하기를, “내가 나이 칠순七旬이 지나서 일을 기필할 수는 없으나, 대사의 명령이 지극히 중하니 감히 공경하여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국통이 이에 달친達嚫의 매달 봉급을 모조리 희사하여 주었다. (하지만 칠순 노인에 노우가 바보인가? 이러다 엮이겠다 싶어 난 이제 늙어서 못해여 하고 땡깡 부리니, 그라마 더 쳐주께 해서 이 오야붕 스님이 자기한테 들어오는 시주품을 모조리 준다는 조건으로 겨우 달랬다.)

노공이 이미 명령을 받고 정림사井林寺 주지 대선사 승숙承淑과 간선幹善하는 중인 이름이 공양供養이라는 사람과 마음과 힘을 합해 장인들을 감독하여, 이해 봄 3월부터 기공해서 가을 9월에 이르러 준공하였다. 처마와 기둥은 반공에 날고 춤추듯 하고, 금빛과 푸른빛은 드높아서 눈을 놀라게 했다. (아마 대웅전 완공을 말하는 듯하다. 6개월만에 후딱 해치웠다. 노우는 종합장인이었나 보다.)

국통이 다시 공功과 산山이 쉽게 이루워진 것을 기뻐하며 길한 때를 택하게 해서 겨울 10월 14일부터 시작하여 3일 동안의 기간을 정하고, 육산六山의 명덕名德 3천여 명을 불러모아 크게 경석慶席을 베풀고 처음으로 자기가 새로 지은 법화예참法華禮懺의 의식을 행하여 낙성(落成)하였다. (낙성식에 즈음해 천태종 승려들이 종정 예하 명령에 다 달려왔다. 총무원에서 징발하기도 했겠지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할 것을 알았으므로 성황을 이루었다.)

대반일大半日에 임금께서 우대언右代言 이광시李光時를 보내어 향촉을 바쳐 경앙敬仰의 정성을 폈다. 국통이 법호사法護寺 주지 대선사를 청해 자리에 올라 설법하게 하고 임금의 수한이 연장되도록 빌었다. 3일 동안에 성안의 높고 낮은 사중四衆이 다투어 서로 왕래하여 설법을 듣고 인연을 맺은 자가 담장처럼 서 있었다. (임금도 가만 있을 수는 없는 법. 가오는 살려야겠고 직접 왕림할까 하다가 귀찮았다. 대신 비싼 향촉을 보냈다. 낙성식은 대목이라 이때 확 땡겨야 한다. 땡기려면 이벤트가 있어야 하는 법. 광고 판촉이 성공해 달려온 사부대중이 시주를 잔뜩 했다.)

이 절에 오래된 우물이 있어 가장 깊고 크기는 하나, 냄새가 났다 깨끗해졌다 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9월부터 그 냄새가 날마다 더해졌기 때문에 매일 재齋하는 부엌일에 있어서 물 길어 오는 데에 괴로웠다. 이 자리를 베풀고 대중을 모으려 할 때에 공운供雲은 비록 모였으나 부족한 것은 물이었다. 절 사람들이 몹시 걱정하여 국통에게 알리니 국통도 곤란하게 여겼다. 그런데 모임이 있기 사흘 전에 우물이 홀연히 변하여 지극히 맑고 깨끗해졌으며, 달고 시원한 맛이 더하였으니 이것도 한 가지 기이한 일이었다. (낙성식에 즈음해서도 신이한 일이 있어야 하는 법! 물이 더러운 우물이 각중에 깨끗해 지는 신이함이 있었다. 아마 준설 청소를 한 듯하다.)

또 모임이 있기 사흘 전에 천기가 변하여 눈이 녹아 비가 되어 먼지를 깨끗이 씻었고, 도량을 연 3일 동안에도 하늘이 개고 따뜻하였으며, 모임을 파하던 날 저녁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으니 이것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아, 이 일단의 인연이 만일 현성賢聖들이 명명冥冥한 속에서 보살피고 천룡天龍이 은밀히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신령스러운 상서의 감응됨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옛날 불룡佛龍 신승神僧이 말한 “절이 만일 이루어지면 나라가 곧 맑아진다.”는 징험 또한 서서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신이함은 쌍으로 나타나야 효과가 극대화하는 법)

국통이 이 사실을 전의 공적과 함께 멀리 전하려 하고 또 나에게 명하므로 곧 그 일의 전말을 써서 이전에 쓴 기記에 부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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