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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사촌, 할아버지 할머니가 같은 형제

by taeshik.kim 2023.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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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로 보이는가?



강진에서 유배생활하던 시절 다산이 아들 정학연한테 보낸 편지 중 한 통으로 기억하는데, 그에서 다산은 요새 세태를 보면 사촌들이 교유가 없어 남보다도 못하니, 너는 사촌들이랑 잘 지내야 한다고 당부하는 꼰대스런 장면이 있다. 조선후기가 그랬을진대 요새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 집안은 조선시대와 현대가 착종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소백산맥 기슭 어느 농촌, 개중에서도 집성촌 출신임에랴?

나한테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두 분이시라, 아버지가 후손이 없는 작은아버지한테 양자로 가시는 바람에 일찌감치 가계가 독립했으니, 이 경우 가계 독립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이 제사라, 아버지야 생물학적 아버지, 그리고 호적상 아버지가 다르다 해도 생부와 양부라 양쪽 제사를 모셨지만, 나만 해도 이미 내가 자라 어느 정도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을 적에는 큰아버지, 혹은 큰집에서 지내는 할아버지 제사에는 참석한 기억이 거의 없다.

1800년대 말에 태어난 할아버지 형제가 어찌되는지 족보를 뒤져봐야 하겠지만, 볼것없는 집안 내력도 제대로 나는 조사한 적이 없고, 그것을 이제 물을 만한 데도 집안 어른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고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말씀이 많은 분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호적을 들여다 보니 생물학적으로는 작은할아버지, 호적상으로는 할아버지는 1895년 갑오생이다. 그러니 나한테 생물학적 할아버지야 그보다 적어도 한두 해는 앞서지 아니하겠는가?

이 생물학적 할아버지가 내 기억에(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4남1녀인가를 두셨으니 아버지는 셋째라, 아버지는 1921년생으로 주민등록에 올랐지만, 듣자니 이건 돌아가신 형님이요, 당신은 한 살 실제는 어리다는 말씀을 한 적 있다고 기억한다.

이 생물학적 할아버지 할머니 후손이 지금 몇 명인지 모른다. 하도 다 뿔뿔이 흩어져 이젠 파악도 되지 않는다.

사촌은 같은 조부모를 하는 같은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 경우 할아버지가 관건이라, 할머니는 다르다 해도 아무튼 보통 우리는 같은 할아버지를 두고 갈라져 나온 제3세대를 사촌이라고 이름한다.

할아버지를 거쳐 그 아버지 세대를 오면 그 아버지 형제자매한테서 난 자식들을 사촌이라 한다. 이 아버지 형재자매 중에서도 여성을 일러 고모라 하며, 그 고모한테서 난 자식들은 고종사촌이라 해서 구별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사촌이 얼마나 혈육으로는 가까운가? 하지만 실제는 그러지 못해서 요새는 얼굴 한 번도 안 본 사촌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아버지보다 열 살 많은 큰아버지는 형제 중에는 장수를 누린 분이라, 가장 먼저 나고도 가장 늦은 89살에 돌아가셨다.

내 기억에 큰아버지는 딸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자제는 아들만 다섯이라, 나한테는 모두가 엄청난 나이차가 많은 형님들이다.

한국개신교계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김순권 목사가 바로 사촌형님이시다. (이 형님은 나이 차이도 많고, 또 하도 일찍 고향을 떠나시는 바람에 나를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기독교계에서는 똑똑한 분인지 모르나, 집안 대소사에서 가끔씩 뵈면 나를 언제나 기억 못하시는 걸 보면 별로 기억력이 좋은 분은 아니다. ㅋㅋㅋ)

큰아버지 쪽 사촌형님 다섯 분 중에 이젠 저 목사님과 막내아드님 둘만 남았다. 그제 넷째 형님이 향년 81세로 세상을 버렸다. 어제 부산 빈소에 다녀왔으니, 길이 어긋나는 바람에 두 분 형님은 뵙지 못했다.

아버지 기준으로 다시 열살 아래인 작은아버지는 2남1녀를 두셨는데, 그 사촌들과 작은어머니 모시고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고는 올라왔다.

창원 사시던 고모는 5남1녀인가를 두셨으니, 그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서 그 고종사촌 가장 큰형님이 조금은 씁쓸하게 그랬다.

"이제 우리가 언제 보겠노?"

하지만 의외로 결코 자주였다고 할 순 없겠지만 이후에도 더러 만나는 날이 없지는 않았으니, 결혼 아니면 초상이 그런 자리를 마련해 준다.

나한테는 배다른 형님(살아있었으면 일흔셋일 것이다)이 있었지만, 그 형님이 아주 일찍이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돌아다닌 데다, 1987년 불귀의 객이 되고 아버지조차 이내 기력이 쇠하셔도 거둥을 못하시는 바람에 아주 일찍이 애늙은이가 되어 각종 집안 대소사에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참석하곤 하지만, 오죽 사촌형제가 많아 김천 어머니한테 연락이 오는 집안대소사 중 저 둘은 되도록이면 참석하지만, 기타 일들을 어찌 내가 다 챙기겠는가?

그만큼 사촌간 왕래는 더욱더 성기게 되니, 이제는 남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가고 만다. 그렇다고 애타게 이를 아쉬워한다한들 흐름을 돌이킬 수는 없고, 어찌 보면 이리 사는 게 편할 수도 있다.

그제 돌아가신 형님은 유독 정이 많았다. 천지사방 집안대소사 당신 일이 아닌 것이 없어, 이런저런 크고작은 집안일들을 챙기셨다. 그만큼 잔소리도 많은 편이었다. 이 형님은 친부인 큰아버지보다 외모가 작은아버지인 내 아버지를 더 닮아 나한테는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친근한 형님이셨다.

이 우리집안 사례를 보면 집성촌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후기 농촌사회가 급속한 현대화 흐름에서 어떻게 그 가족을 기반으로 삼는 공동체가 해체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본다.

이 우리집안 사례를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하다가, 그나마나 살아남은 집안 분들을 붙잡고 증언채록이라는 것을 시도하다가 30분이 채 되지 아니해서 눈물바다가 되고, 당신들 인생 성토자리가 되는 바람에 이내 중단하고 만 일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한 번 했다.

같은 할아버지, 같은 할머니 밑에서 난 형님 한 분이 또 떠난 마당에 감정이 없을 수는 없어 객설처럼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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