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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산성 무용론이 봇물터지듯 한다.
산성을 놔두고 적들이 횡하니 지나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백마산성 임경업이 그 결정적 단초였다.
호언장담..
하지만 철기군은 잘 있으레이 한마디 남기곤 한양으로 휑하니 날았다.
멍 때린 임경업이 할 일은 암것도 없었다.
산성이 효용성을 지닐 때는
첫째, 적이 쌈을 걸어와야 하고
둘째 걸어오지 않고 지나 쳐도 산성에서 기어나와 끊임없이 적 배후를 교란할 때다.
하지만 조선군은 산성에만 기어박혀 암짓도 하지 않았다.
산성이 효용성을 지닌 유일한 곳이 고갯길.
이곳은 적들 역시 지나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산성 무용론엔 정치투쟁도 점철한다.
윤선도는 대표적 산성 무용론자였다.
산성이 완전 폐기되기는 조선말 대한제국이었다.
실제 페기된 것이며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그런 산성이 느닷없이 한국전쟁에 다시 살아났으니 아이러니다.
***
3년 전 오늘, 2018년 5월 8일 북한산 칼바위능선에서 휘갈긴 글이다.
어버이날, 나는 뭐하러 북한산을 올랐으며 거기서 무슨 윤선도와 임경업 타령이었던고?
그나저나 산성은 숙종 때 전국적인 재정비를 하게 되는데 돈 열라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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