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작은아버지에게 쫓겨난 대우황자大友皇子의 노래 두 수

by taeshik.kim 2018. 2. 27.
반응형

667년, 한반도가 신라에 의한 반도 통일 전쟁으로 요동을 치던 그 시절. 신라가 당군을 끌어들여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백제를 멸한 것이 그로부터 7년 전인 660년. 망가진 백제 사직을 돌려놓겠다며, 왜의 여주(女主)로서 아들인 中大兄황자에 의해 두 번째로 왕위에 옹립된 이가 제명(齊明. 사이메이) 천황. 


제명은 두 번째 재위 5년째인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이듬해인 661년(제명 7년),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로 진군하겠다며 아들 중대형과 함께 서울을 떠나 츠쿠시(축자. 筑紫)에 집결한다. 하지만 항전을 기다리던 제명이 츠쿠시에서 사망하자, 이에 中大兄이 재위에 오르니 이가 천지천황(天智天皇. 텐치천황)이다.


실제 그의 즉위는 661년이나, 즉위 원년은 이듬해로 삼는다. 이는 前王 재위 말년과 新王 즉위 초년이 겹치는데 따른 혼란을 피하기 위한 이른바 즉위년 유년법이다. 


백제를 멸한 신라와 당은 662년, 고구려 정벌에 나서게 된다. 그러자 고구려는 倭에 도움을 청한다. 합동전선을 펴서 신라-당의 예봉을 극복해 보자는 것이다. 倭가 이에 부응할 수 없던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한 다음 신라와 당의 다음 정벌 대상이 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당시 국제정세를 봐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이런 절박한 사정에서 倭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뿐이었다.

첫째 결사 항전. 하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둘째 자발적인 굴복. 신라와 당에 굽신거리면서 신하의 예를 취하는 길밖에 없다.


당시 정국을 보면 사실 倭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유화책으로 신라에 대한 애걸복걸이 있다.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자 왜 조정은 배 두 척을 뇌물로 바친다. 한 척은 당시 신라왕인 문무왕 김법민을 위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당시 신라의 최고 실력자인 김유신을 위한 것이었다.


텐치는 강경책도 구사하는데 그것이 바로 663년에 도발한 저 유명한 백촌강(白村江) 전쟁이다. 이 백촌강은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설이 구구하나 금강 어구로 본다. 하지만 2만7천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동원한 이 전투에서 왜군은 신라군에 대패하고 몰살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한 교두보이자 거점이라고 간주한 백제 부흥이 물건너간 667년, 텐치는 도읍을 오우미(근강. 近江)로 옮긴다. 이듬해인 66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회복한다. 이를 발판으로 그 이듬해인 669년에는 텐치는 이번에는 당에 대규모 사신을 보내어 머리를 조아린다. 그 답례로 당은  664년에 이미 왜국에 사신으로 다녀간 바 있는 곽무종이라는 자를 대표단으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다. 이렇게 해서 텐치는 당과 신라가 주축을 이룬 동아시아 국제정에서 고립화의 위기를 타개한다.


국제정세를 유리하게 돌려 놓은 텐치. 하지만 그는 그 얼마 뒤인 671년에 사망하고 만다. 여기서 왜 조정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그 정국 중심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텐치 아들인 오오토모(대우.大友) 황자. 다른 한 명은 텐치 동생인 오오아마노오오지(대해인. 大海人) 황자. 


천지천황은 애초에 후계자로 동생인 대해인을 지목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년에 헷가닥 머리가 돌아버려 아들 대우황자에게 대권을 물려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 시각인데,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 원래 대권이 천지에게 있었음을 선전하는 기술일 가능성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이런 권력투쟁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는 지통(持統)이라는 여자. 그녀는 아버지가 천지천황이니 그 장녀다. 大友황자에게는 누나였다. 여기서 잠시 천지천황이 생산한 자녀 관계를 나이 순서대로 볼짝시면 


1. 장녀 지통 

2. 초벽황자비가 된 차녀 원명(元明) 

3. 셋째로 아들로는 장남인 대우황자 

4. 차남인 시기(施基)황자 

5. 삼남인 하도(河島)황자


가 있었으니, 이 중 장녀 지통은 아버지 천지천황의 동생, 그러니까 작은아버지인 大海人 황자에게 시집을 갔다. 이른바 근친혼이었던 셈인데, 대해인-지통 사이에서 난 장남이 초벽(草壁)황자이니, 이 초벽황자가 다시 어머니의 바로 밑의 동생, 그러니까 이모인 元明과 혼인하게 되니, 뭐 복잡하게 계보 생각할 것 없다.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와 거의 똑같은 콩가루 혼인 패턴은 신라 또한 여전했다. 신라 왕실 계보도 그리다 보면 복잡해서 미치고 팔짝 뛰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극심한 극친혼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한 본론은 이게 아닌데, 얘기가 너무 옆으로 샜다. 그 배경을 설명하려다가 전혀 엉뚱한 얘기가 되야 버렸으니, 본론은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잘란다. 자기 전에 한마디.


이 권력투쟁에서 지통은 누구 편을 들었는가? 아버지인가 남동생인가 남편인가? 


2005.06.27 00:50:5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