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령총을 발굴 중인 국립경주박물관이 작성한 경주 금령총 재발굴(3차) 2차 학술자문회의 자료집 pdf를 블로그 탑재용으로 용량 감축한 버전이다.
이 발굴을 직접하는 박물관 신광철 선생이 신신당부하기를 이 자료집 수록 내용 중 "마지막 복원도는 수정이 좀 필요하다. 상부 적석積石 부분을 고쳐야 한다"면서 이 점을 혜량 부탁했으며, 아울러 이번 조사 성과는 12월 중순에 신라학강좌에서 한 번 정리해서 소개할 예정이라 하니 참고바란다.
Ⅴ. 조사 성과
이번 조사 범위는 금령총 매장주체부와 봉토부를 중심으로 남쪽의 옹관묘를 포함한다. 총 60㎡ 범위에 걸쳐 2020년 5월 25일부터 현재까지 실조사일수 120일 계획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사 결과 다음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봉토부
총 8개의 트렌치를 설치하여 층위를 확인하였으며, 금령총의 축조 기법 및 공정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볼만한 요소들을 몇 가지 확인하였다.
1-1. 봉토부 축조 기법을 살펴본 결과, 적석부에서 바깥쪽으로 성토한 뒤 마지막에 호석을 조성해 마무리하는 일반적인 방식과 차이가 있었다.
금령총에서는 적석부에서 바깥쪽으로, 호석에서 안쪽으로 각각 성토를 한 뒤 가운데의 빈 공간에 적석부를 구성하는 석재와 동일한 크기ㆍ형태의 천석을 채워넣는 식으로 봉토부를 구축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방식이 적용된 것은 맞지만, 각 트렌치마다 세부적인 퇴적 양상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즉, ‘적석부에서 바깥으로 성토, 호석을 구축하고 안쪽으로 성토, 가운데 빈 공간은 천석으로 채워서 양쪽의 성토 구간을 견고하게 유지’한다는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세부 축조 과정은 다소 자유롭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1-2. 위와 같은 층위 양상은 적석부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설치한 트렌치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적석부 외면의 횡방향 단면에서도 확인되었다.
봉토부 제거 과정에서 종방향의 구획성토 흔적(경계석, 토낭, 목주열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 봉토 기저부의 정지면 양상을 살펴봤을 때 종방향의 구획성토 흔적 대신 적석부를 둘러싼 환상의 정지층이 확인되었다.
1-3. 봉토부 기저면을 살펴봤을 때 서쪽에 비해 동쪽 기반층의 자갈 포함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는 금령총이 입지한 미고지가 형성될 당시 물의 영향을 동쪽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받은 결과물로 보이며,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금령총이 조성될 때 분명하게 인지되었던 것 같다.
서쪽에 비해 동쪽의 봉토부 기저면에서 목탄이 폭넓게 깔려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방습의 효과를 얻기 위한 정지 작업의 결과물로 보이며, 그 사이에서 토기편들이 수습되어, 정지작업 이후 일종의 의례행위가 1차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매장주체부
조사 전 매장주체부 내부는 일제강점기 조사시 되메운 석재와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한 당시 적석부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내부에서 제거한 석재를 적석부 내면에 덧대었는데, 해당 교란면이 가장 두터운 서쪽 적석부를 우선적으로 절개해 단면의 층위를 파악하였다.
2-1. 적석부 서쪽의 단면을 통해 파악한 적석부의 축조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기반층 상면을 점질토로 편평하게 정지함
② 지하로 1.2m를 굴착하되 입구부가 완만하게 외반하는 형태로 굴착
③ 묘광 전면에 약 15~20㎝ 두께로 판석을 깔아 1차 정지작업을 완료
④ 외곽 설치 후 묘광 벽체와의 사이에 천석을 채우되 벽면에는 점성이 강한 사질점토를 발라 공극을 메움. 기반층 상면의 정지층 높이까지만 적석을 채움
⑤ 묘광 굴광선보다 바깥쪽에서부터 적석을 쌓되 외곽 벽면에 기대어 안으로 들여쌓음. 높이 약 90㎝ 정도로 적석 1단을 형성
⑥ 적석 1단 상면의 높이에 맞추어 호석 방향으로 1차 성토 실시
⑦ 적석 1단과 1차 성토면이 만나는 경계선보다 바깥쪽에서부터 적석을 쌓되 외곽 벽면에 기대어 안으로 들여쌓음. 높이 약 90㎝ 정도로 적석 2단을 형성
⑧ 적석 2단 상면의 높이에 맞추어 호석 방향으로 2차 성토 실시
⑨ 적석 2단과 2차 성토면 위로 상부 적석을 덮음
⑩ 상부 적석 위로 점토 밀봉을 하고 봉토를 덮음
2-2.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매장주체부에서 유물 수습을 완료한 뒤 기반층까지 굴착해 정지층을 확인하였으나, 적석부 벽면을 굴착해 묘광 벽체까지 도달하지는 않았다.
그로 인해 적석부의 정확한 형태나 규모를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재발굴을 통해 금령총 적석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금령총은 10.0×8.0m 크기의 다소 일그러진 마름모형 묘광을 굴착한 뒤 2중 곽을 설치한 형태인데, 외곽의 규모는 7.0×5.5m, 내곽의 규모는 4.8×2.5m이다.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의 기록과 유리건판 사진 등을 참고했을 때 당시 내곽 범위까지만 조사가 이루어지고 이를 토대로 입단면도가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3. 금령총 주변의 소형 분묘
금령총 남쪽 및 남서쪽에 선축된 2기의 고분(127-1ㆍ2호분)이 위치하며, 127-1호분 상부에서는 그보다 늦게 조성된 옹관묘(127-5호)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127-5호묘에 대한 조사만 완료하였고, 나머지 분묘에 대해서는 추후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3-1. 금령총은 남쪽에 선축된 127-1ㆍ2호분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설계ㆍ축조된 고분이다.
127-2호분과 만나는 부분은 호석을 안쪽으로 약 1.6m 정도 들어오게 설계를 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127-1호분은 호석의 위치를 약간 옮기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봉분 일부를 중복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이에 127-1호 봉분의 일부를 삭평하여 그 위에 두껍게 점토를 밀봉하였는데, 이는 경계선의 의미도 있지만, 금령총 봉토부 조성시 기저부를 정지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127-1호분의 북쪽 호석이 금령총 봉토부 안쪽에서 확인되었는데, 호석 외부에서 다수의 토기편이 수습된 것으로 봐서 금령총 축조시 무덤 축조와 관련된 의례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2. 옹관묘는 선축된 127-1호분의 봉토부 및 매장주체부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는데, 127-1호분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벗어난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127-1호분의 봉토 대부분을 파괴하고 굴착한 타원형의 수혈 바닥에 천석 및 자갈을 이용해 1차 정지작업을 한 뒤 길이 높이 1.3m 규모의 대옹을 동서 방향으로 안치하였다.
동체부 내부에는 전면에 잔자갈을 깔아 시상대를 만들었는데, 장경소호와 고배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밖에 내부토를 체질하여 구슬을 수습하였다.
입구는 천석과 점질토로 밀봉하였으며, 옹관의 주변과 상부에 여러 겹으로 돌을 쌓아 적석부를 형성하고 그 위로 봉토를 덮어 마무리하였다. 정확한 축조 시점, 선행 분묘와의 관련성은 추후 정밀한 유물 분석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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