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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서 비롯됐다는 강인구의 유산은 어찌 봐야 하는가?

by taeshik.kim 2022.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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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23일 향년 86세로 타계한 강인구 선생이 뇌리에 각인한 사건은 1983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발견했다는 일이다. 전방후원분이란 시신을 묻는 이른바 매장주체부는 봉분을 둥글게 만들되 그 전면 앞마당은 네모낳게 단을 지은 형태로 고분시대 일본 열도에서는 일반화한 형태라서 일본 고대 문화 특질로 간주되던 터였다.

한데 일본 열도에만 존재하는 줄 안 그런 무덤이 한반도에서 출현했으니, 더구나 그 시대는 식민잔재 청산 바람이 거센 때라, 그런 일본적 느낌이 완연한 왜색 무덤이 출현했다는 그것이 곧바로 일본 문화의 한반도 기원설을 말해주던 증거로 통하던 시절이라, 이 사건은 도하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었다.

상식으로 보면 일본에서만 확인되던 고대 일본 색채가 농후한 흔적이 한반도에서 발견됐다면 그것이 대표하는 일본 문화가 한반도에 침투한 흔적으로 봐야 하는데, 당시는 그런 상식이 통하던 시대가 아니라서 무조건 그런 증거가 나오기만 하면, 그런 일본 문화 특질을 한반도에서 전해준 증거로 포장하던 시절이라, 저 사건 역시 그런 각도로 조명되었으니


당시 이 일을 보도한 저 경향신문 기사는 그런 경향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하겠다. 보다시피 그런 일본적 색채 농후한 전방후원분 발견이 이렇다 할 의문도 없이 일본문화 원류는 한반도, 쉽게 말해 일본문화의 모든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라는 증거로 판매된 것이다.

강인구 선생이 전방후원분이라고 발표한 데는 고성 송학동 고분.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나중에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이 무덤은 전방후원분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물론 할 말은 있다. 당시 내부 조사를 하지 못한 채 실측만으로는 그렇게 오해할 만한 여지가 얼마든 있었다는 사실은 대체로 고고학계에서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럴 여지가 있다는 것과 실제 그렇다는 것은 왕청난 차이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저와 같이 전방후원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곳이 전방후원분이라는 믿음을 선생은 버린 적이 없다. 생전에 저 송학동 고분이 발굴조사를 통해 전모를 드러낸 직후 내가 그와 직접 통화해서 그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그는 결코 그것이 전방후원분이 아니라는 발굴조사단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끝까지 자신의 설이 맞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저 사건을 어찌 평가해야만 할까? 단순히 헛다리 짚은 사건으로만 치부해야 할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비록 그가 전방후원분이라 해서 짚은 데는 틀렸지만 이후 우후죽순으로 실제 전방후원분임이 분명한 무덤이 곳곳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만 지역으로 보면 지금의 호남지방에 집중하며, 기타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경남 같은 데서 출현할 가능성은 열어둬야 한다.

송학동 고분 채색 무덤방. 이런 붉은 채색을 왜계 전통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오판이다. 주칠을 하는 전통은 신라사회에서도 강고하다. 왜색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전통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간단히 말해 그는 틀렸지만 결과로 보면 한반도에도 전방후원분이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이걸 어찌 가치매김해야겠는가? 이 점이 심히 나로서는 고민이다. 그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만 그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음을 짚었으며 그것이 결국 나중에 사실로 드러났으므로 그러한 학설사 포문을 연 점은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내가 알기로, 또, 이쪽 고고학 전문가인 이정호 동신대 교수한테 문의한 결과도 그렇거니와, 그가 주장한 전방후원분으로 처음 존재를 드러낸 것은 1990년 3월에 알려진 해남 방산리 고분이었다. 이후 같은 해남군 용두리고분 역시 전방후원분임이 밝혀져 이듬해 발굴조사가 실시되기도 했다.

이 용두리고분은 훗날 송학동 고분 전방후원분설 허탕을 친 강인구 선생이 실측조사를 통해 밝혀냈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다시 말해 송학동에서 허탕친 그가 용두리에서는 제대로 짚어낸 전방후원분을 찾아낸 것이다. 따라서 그의 83년 주장은 다른 데서 실증을 확보한 셈이 된다.

다만, 그가 애초 그런 주장을 들고나오면서 외친 일본문화 한반도 전래설은 무참히도 짓밟히고 말았으니, 한반도 전방후원분은 그런 문화가 일본열도로 전파됐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라 외려 그런 특징을 지닌 일본열도 문화가 한반도로 이식됐음을 의미하는 증거로 드러난 것이다.

또 한 가지 유념할 대목은 송학동고분은 비록 전방후원분은 아니었지만, 내부 조사를 통해 드러난 면모는 여러 모로 동시대 일본 열도 문화가 이식한 흔적이 농후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를 확대해석하면 송학동 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왜인이거나 혹은 적어도 처가는 왜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왜색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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