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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추적, 한국사 그 순간 -1-]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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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춘추 방에 언니 대신 동생 들여보낸 까닭

[중앙선데이] 입력 2016.06.26 00:40 | 485호 23면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이민족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혈통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는 불완전한 민족 통일을 달성했다는 이유로 김춘추와 김유신(595~673)을 싸잡아 비난했다. “김유신은 지용(智勇·지혜와 용기)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陰險鷲悍)한 정치가며, 그 평생의 대공(大功)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인국(隣國)을 난(亂)한 자”라고 했다. 음험취한은 요컨대 음흉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단재는 그 보기로 그가 김춘추와 처남 매부가 된 사연인 소위 ‘축국(蹴鞠) 사건’을 들었다.

  

혹독하기 그지없는 이런 평가는 그 이전까지 천 수백 년가량 지속된 만고의 충신이라는 김유신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붕괴시켰다. 단재의 평가가 얼마나 타당한지는 논외로 부친다. 다만, 그 포폄(褒貶)의 정치적 목적성이야 무엇이건, 김유신이 대단한 모략가적 기질을 지닌 군인이요 정치가였음은 분명하다.

 

문희를 태우라!!!

  

김유신이라고 하면 거개 가야계라는 그의 출신이 핸디캡으로 유별나게 강조된 까닭도 이에서 말미암을 것이다. 즉, 김유신은 소위 ‘골품제’라고 하는 엄격한 신분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은 신라사회에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김춘추라는 신라 정통 진골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음모가 성공함으로써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주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재가 김유신이 음험취한하다고 한, 대표적인 증좌로 거론한 저 유명한 사건, 다시 말해 김유신이 기획한 축국 사건은 어떠한 내막이 있었을까. 도대체 이 사건이 어떠했기에 김유신은 저런 악평을 들어야 했던가. 정말로 김유신은 음험취한했던가.

  

김유신에겐 보희(寶姬)와 문희(文姬)라는 여동생 자매가 있었다. 이 중 동생 문희가 보희 대신 김춘추와 혼인하게 된 사연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이에 걸맞게 이 일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전한다. 이는 최근 공개된 필사본 『화랑세기』에도 보이니, 이곳 18세 풍월주 춘추공(春秋公) 전에 그 전말이 나온다.

  

각 문헌별로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다음 골자는 같다. 김유신이 정월 기오일(烏忌日·15일)에 자기 집 앞에서 김춘추를 불러 축국(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놀이)을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고름을 찢었다. 유신은 이를 기워준다면서 자기 집으로 춘추를 데리고 고즈넉한 방에 몰아넣고는 처음에는 보희더러 춘추가 있는 방에 들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보희는 하필 이날 무슨 일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유신은 문희더러 들어가게 하니 역사는 이에서 이뤄졌다. 이때 시작한 둘의 밀회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문무왕 김법민이다. 말하자면 문희는 보희의 대타였던 셈이다.

 

춘추야 나와레이!!

  

춘추가 문희를 처음 본 순간을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즉위년(661년) 조에서는 “옅은 화장과 날렵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사람을 부시게 하니 춘추가 보고 기뻐하며 결혼을 청하고 예를 올렸다”고 표현한다. 이 이야기가 문무왕 즉위년 조에 나오는 까닭은 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문무왕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춘추가 문희에게 첫눈에 반해 이내 결혼한 것처럼 기술됐지만 너무 많은 비약이 숨겨있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결합을 고리로 김춘추는 김유신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대권을 쥐니 그가 태종무열왕(재위 654~660년)이다. 문희 또한 덩달아 정비가 되어 문명(文明)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사실 단재는 이러한 춘추와 문희의 결합을 비상히 주목하면서 김유신의 모략가적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단재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빛나는 김유신의 계략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결합을 보면서 궁금하기 짝이 없는 대목은 도대체 보희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파악하기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즉위원년 조에서는 “언니(보희)는 무슨 일이 있어(有故) 나오지 못하고, 그 동생(문희)이 나와서 꿰매어 드렸다”고 해서 ‘유고(有故)’ 사태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보희에게 일어난 ‘유고’가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다만 유의해야 할 대목은 김유신이 원래는 보희를 염두에 두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보희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김유신은 보희에게 사고가 생긴 사실을 이때서야 비로소 알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삼국유사』에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이야기이니, 이에는 춘추가 문희를 얻게 된 사정을 비교적 자세히 적었다. 이에는 보희가 “어찌 사소한 일로 귀공자에게 경솔히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면서 오빠의 뜻을 거부했다고 한다. 한데 보희가 내세운 논거가 소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 윤리관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설혹 그 시대에 이런 유교적 도덕관념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해도, 동생 문희는 왜 춘추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국유사』 또한 『삼국사기』와 동일하게 김유신이 애초에 보희를 점찍었음은 주목해야 한다.

  

셋째, 앞서 인용한 『삼국유사』 이야기 중간에 달린 협주(挾註·주석)에는 “옛 책에는 (보희가) 병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고 했다. 보희에게 도대체 무슨 ‘병’ 혹은 ‘유고’가 있었기에 김유신은 그러한 사실도 까마득히 모르다가 병든 혹은 사고 난 보희에게 김춘추를 시중들라고 했다는 말인가.

  

넷째, 『고려사』 첫 대목에 실린 고려 건국시조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탄생 신화다. 앞선 시대 각종 사화(史話)를 섞어 만든 이 설화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년) 때 인물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실린 내용이라 한다. 이에 녹아들어간 설화 중의 하나가 바로 보희와 문희 이야기다. 이 작제건 탄생 설화는 그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김유신과 김춘추, 보희와 문희라는 신라 역사상 실제 인물을 장소와 배경 및 이름만 바꾼 채 고스란히 표절했다. 즉, 김유신은 신라의 송악(松嶽)에 사는 보육(寶育)이라는 인물이며, 김춘추는 당나라 황제로 바뀌어 있는가 하면, 시간적 배경 또한 신라 말로 옮겨져 있으며, 공간은 송악(개경)으로 둔갑한다. 심지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보희가 서형산(西兄山·경주 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서울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는 꿈을 꾸었고,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동생 문희가 언니에게서 꿈을 샀다는 이야기조차 작제전 탄생설화에는 반복한다. 이 설화에는 “중국 황제가 신라 송악의 보육 집에 와서 묵다가 찢어진 옷을 깁는데 언니는 코피가 나서 나오지 못하고 아우가 대신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황제는 (동생인) 진의(辰義)와 동침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작제건이다”고 한다.

 

이 태우기는 발상이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한데 보희의 변신임이 분명한 언니가 하필 이날 코피가 났다고 한다. 『삼국사기』 말한 ‘유고’, 『삼국유사』의 협주에 인용한 옛 책의 ‘병’이 작제건에 와서는 ‘코피’가 되었다. 보희에게 피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화랑세기』 춘추공 전에는 “유신이 일부러 (춘추)공의 치마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시키고자 했으나 병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문희가 나아가 바느질을 해 드렸다”고 한다. 『화랑세기』에서도 분명히 유신이 처음에는 보희를 지목했으나 병 때문에 할 수 없어 그 동생 문희가 대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희에게 일어난 ‘유고’ 혹은 ‘병’으로 표현된 실체는 무엇인가. 이는 월경(月經)에 대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작제건 탄생 설화의 코피는 결정적이다.

  

이처럼 이 사건을 전하는 다섯 가지 기록이 모두 김유신이 애초에 보희에게 병, 혹은 사고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야 알았다고 한다. 이때 보희가 정말로 사고를 당했거나, 병을 앓고 있었다면, 어떻게 김유신이 처음에 이런 보희에게 바느질을 빙자해 김춘추를 시중드는 일을 맡기려 했다는 말인가.

  

김유신. 그는 참말로 무서운 사람이다. 애초에 김춘추의 짝으로 큰 누이를 생각하고 거사를 준비했지만,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작은 누이로 교체를 했으니 말이다. 그에게서 냉혈한의 냄새가 풍긴다.

  

- 흔히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하지만 숱한 사연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은 자명하다. 한국사 변곡점의 순간을 짚어보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언론인 출신 사학자가 풀어가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를 새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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