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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프랑스가 문제였던 인도차이나

by 초야잠필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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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종전 후 전후 처리에 있어 인도차이나만큼 복잡했던 지역은 없다. 

일본제국의 영토는 패전과 함께 공중분해 되었는데, 

그 영토를 1914년 이전으로 되돌리며 조선은 따로 독립을 확약하여 분리하고. 

미군정이 일본을 본격 통치하게 된 후, 일본영토에서 독도, 오키나와, 북방도서 등을 추가적으로 분리하였다 (이 영토들은 한국과 소련의 영토가 되거나 주민투표에 의해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조선은 여운형과 건준, 그리고 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저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건간에, 

일본 패전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군정을 거쳐 3년만에 독립하게 된 것은 카이로-포츠담 선언의 확약대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후 조선에 공포된 맥아더의 미군정의 군정명령 1호를 보면, 

Having in mind the long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nd the determination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the Korean people are assured that the purpose of the occupation is to enforce the Instrument of Surrender and to protect them in their personal and religious rights. In giving effect to these purposes, your active aid and compliance are required.

라 하여 군정의 목적이 카이로-포츠담 선언의 준수와 일본군 항복 및 무장해제의 관철, 조선인의 인권의 보호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실제로 이 군정명령 1호에 있는 문구는 카이로 선언의 문구를 그대로 따 넣은 부분이 있는데,

맥아더의 확약대로 3년만에 미군정은 종식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반면, 인도차이나의 호치민의 베트민-베트남민주공화국 (북베트남)이 남한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프랑스 때문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2차대전 종전 후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거의 모두 독립의 길을 밟아갔는데, 

유독 프랑스만 죽어도 식민지를 놓지 못하곘다고 버텼다는 말이다. 

따라서 종전후 인도차이나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던 프랑스에 대한 선제공격 격으로 19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나, 

이후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모두 시대착오적인 프랑스 정부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이 베트남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명백히 반식민주의,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전후 인도차이나 간섭을 돌이켜 보면 베트남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베트남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한국전쟁에 뒤집어 씌워버린것이 지금까지 한국 좌파의 생각이었다 할 수 있다. 

한국의 미군정기와 한국 전쟁은 베트남의 종전 이후 상황, 그리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말이다.

한국전쟁은 오히려 2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더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이 개입하면서 1차 전쟁 때의 민족해방전쟁 성격에서 이데올로기적 전쟁-냉전기의 열전의 양상으로 바뀌는데, 

실제로 베트남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국전쟁과 성격이 더 비슷하다는 말이다. 

1차인도차이나 전쟁의 발생원인과 그 전개를 한국전쟁에 뒤집어 씌워버린 것. 

그것이 바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논법이라 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한국판 베트민으로 건준과 인공을 띄운것이다. 

이러한 설법은 전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관계를 딸과 어머니로 묘사한 영화 인도차이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는 논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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