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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평안남도 강동 지역)·함흥咸興·평창平昌·강릉江陵·회양淮陽·안변安邊·철원鐵原 등 여덟 고을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 군수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보살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쪽의 병란兵亂을 미리 예측하고 말과 식량을 많이 비축해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릉智陵(이성계 증조부의 묘)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황해도의 다른 이름)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은 한민족대백과사전 양사언 관련 항목 기술이다. 씰데없은 조사는 지워버리고 전재한다.
통정대부通政大夫란 조선시대 정3품 품계명으로, 당상관堂上官 말석을 차지한다.
임란 직전을 살다갔으며, 서예로 아주 유명했고, 무엇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운운한 양사언楊士彦(1517~1584년)이라는 사람 족적이다.
막판에 당상관이 되었으니 그런 대로 출세했다 할 수 있겠다.
한데 저런 이력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어엿한 문과 급제자라는데 빌빌 지방관으로만 싸돌았다.
본래 문과 급제자가 지방관을 한두 번 역임하기는 하지만 저린 식으로 빌빌 싸는 경우는 없다.
사시 행시 외시 합격자가 저렇게 돌 수 있단 말인가?
저 양사언을 두고 천출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거니와 이 점이 수상쩍기 짝이 없다.
아니라는 견해가 좀 있는 듯하지만, 저 관력官歷을 보면 딱 서출들이 하는 짓이다.
서출 혹은 부모 가문 잘 만나 빽으로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이 하는 짓이랑 똑같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훗날 연암 박지원이다.
스스로 과거는 포기했다 주변에는 개뻥을 친 모양이지만 실은 거듭 낙방하다가 내 갈 아닌가벼 하고 포기하고 말았을 뿐이니,
그럼에도 워낙 집안이 잘나서 음사로 출사해 현감이니 군수니 하는 자리를 맴돌다가 훗날에는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니,
부사 중에서도 아무도 안가는 그런 외진 부사로 나갔을 뿐이다.
한데 저 양사언 족적을 보면 서출로 그런 대로 눈도장 찍어 관직에 진출한 경우, 혹은 고시에 거푸 낙방하는 빽으로 지방관 자리 하나 얻어 걸린 낙오자들 행적과 똑같다.
결론은?
양사언이 천출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나 서얼 취급 받았음은 명백하다.
이 양사언이 가고 난 뒤 두고두고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호명되어 나온다.
왜?
어떤 맥락에서 양사언은 때마다 관착에서 호출되어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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