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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막부정권4

[제3차 고려 막부정권] (6) 서경 행차 빙자해 막부를 타도한 현종 1014년 11월 1일 출범한 김훈 막부정권은 존속기간이 아주 짧아 불과 4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그 사이 민심은 흉흉해져 쿠데타가 발발한 11월에는 난데없이 수도 개경에서 승려들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헛소문이 돌아 비상계엄이 발동되었는가 하면, 이듬해 1월에는 압록강을 끼고 다리를 건설하고는 그 동·서쪽에 성을 쌓을 거란을 징벌하고자 군대를 보내 시설을 파괴하고 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런 거란이 1월 22일 계묘에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고려에서는 장군將軍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弋이 맞서 물리치기도 했지만 거란의 공세는 계속되어 통주通州를 공격한 일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3월이 되자 현종은 서경 행차를 단행한다. 이것이 거란과 계속 부닥치는 서북면 일대 민심 안정화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이는 명분.. 2024. 2. 9.
[제3차 고려 막부정권] (4) 쿠데타 이틀 만에 막부를 만든 김훈과 최질 상장군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주도한 쿠데타 군은 개떼처럼 궁궐로 들이닥쳐 덕석 말이를 해서 흠씬 두들겨 팬 황보유의黃甫兪義와 장연우張延祐를 현종 앞에 던지며 이 놈들을 내쫓으라 요구한다. 앞선 왕 목종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를 생생히 기억하는 현종으로서는 아이고 나도 형님따라 가는구나 하고 자포자기했겠지만, 그네들 요구사항을 들어보니 순진하기 짝이 없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들이 왕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그들을 요구를 거부하면? 그 자리서 쫓겨나거나 목이 달아나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 고려사절요 기술은 다음과 같다. 왕은 여러 사람(쿠데타 주역들) 뜻을 거스르기가 조심스러웠으므로 일단 그들의 청을 따라 마침내 〈장연.. 2024. 2. 8.
[제3차 고려 막부정권] (3) 강조의 실패를 새긴 쿠데타 주역들 이 3차 막부정권 수립 전야 군사 쿠데타 수뇌진이 누군지는 같은 고려사절요 해당 사건 기술에 명확히 드러나는데 상장군 김훈과 최질, 그리고 박성朴成·이협李恊·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이 그들이라 저에 의하면 이들은 땅(영업전)을 빼앗은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분노를 격화시켰으며,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꾀어내어 북을 치면서 소란스럽게 궁궐[禁中]로 난입하고서는 장연우張延祐와 황보유의皇甫兪義를 포박하고 매질하여 거의 다 죽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표적이었을까? 이어지는 기술. (이들이)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가 면전에서 호소하기를,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토지를 점탈한 한 것은 실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지 조정[公家]의 이익을 위한 것.. 2024. 2. 8.
고려는 태생 자체가 막부 정권이다 동시대 중국은 당唐 제국이 결딴난 상황이라, 절도사 시대가 개막하면서 막부정권 문을 다시금 열었다. 다시금이라 하는 이유는 인류 역사는 언제나 군사력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연 까닭이며, 이에서 후삼국시대 개막과 그에 따른 고려왕조로의 통일 역시 이에서 단 한 치 어긋남이 없는 까닭이다. 절도사에 비견하는 중앙 정부 파견 관리가 없던 신라의 경우, 도독이니 뭐니 해서 무던히도 봉건제후화하는 지방 거점 권력을 억누르고자 했고, 그것이 장기간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겉만 그리보였을 뿐, 속으로는 발호하는 권벌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도독들이 사라진 자리에 숨을 죽이고 있던 지방권력들이 틈바구니를 헤집고 나서기 시작했으니, 깡패 두목들까지 설치는 막부시대가 화려한 팡파르를 울리며 개막했다. 고려는 태..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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