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봉니3

마왕퇴 (10): 인증 도장, 봉니封泥 * 마왕퇴는 문화적 측면은 김단장이 쓰실 것이라 깊이 다루지 않으려 했는데 검토하다 보니 이따끔씩 짧게라도 멘트를 남겨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싶어 이런 것은 함께 다룬다. 마왕퇴에서는 봉니封泥가 나왔는데 그 중에 많은 것이 "대후가승軑候家丞" 그리고 "우위右尉" 봉니다. 열후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 "가승家丞"이라고 한다. 마왕퇴 봉니에서 "가승"명 봉니가 많은 것은 피장자의 사망 후 무덤에 함께 묻는 부장품의 최종 점검을 "가승"이 한 탓이라 한다. "우위" 봉니는 아마도 피장자가 분봉 받았던 "대후국"의 "우위"였을 것이라는데, 대후국의 우위라고는 해도 대후인 피장자에게 피종속 된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대후국에는 별도의 현령縣令이 있었고 이는 한 조정에 직접 종속되어 .. 2023. 10. 29.
순식간에 끝내는 추사의 서명과 인장 추사의 서명과 인장 秋史之署名与印章 Signatures and seals of Chusa 추사 김정희의 서명은 주로 편지에 쓴 이름과 자字 그리고 수결手決(사인)로 전한다. 또 편지 봉투에 찍은 봉함인封緘印도 몇몇 전한다. 봉함인이 바로 봉니封泥다. 추사는 인장을 새기는 전각篆刻에 조예가 깊었고 여러 인장을 사용했다. 성명인姓名印을 비롯하여 추사秋史 완당阮堂 노과老果 등의 호인號印을 자신의 서적, 서화에 찍은 수장인收藏印, 감식을 나타낸 심정인審定印, 유명한 시문 구절을 새긴 명구인名句印, 바람이나 길조를 뜻하는 길상인吉祥印 등이다. 제주시절 제자 박혜백朴蕙百이 그의 인장을 새겼다고 한다. 저 출전은 과천 추사박물관 전시실 입구 비름빡이다. 2023. 7. 22.
봉니封泥 지금은 인장을 종이에 찍는다. 하지만 인장의 전성시대는 종이시대가 아니었다. 종이가 아직 쓰이지 않던 시대가 인장의 전성시대였다. 종이가 없던 시절, 문서를 전달하려면 글을 쓴 죽간이나 목책을 상자에 넣고 끈으로 묶었다. 끈의 마지막 자락을 진흙을 담은 상자에 통과시켜 묶고, 진흙에 인장을 찍었다. 이렇게 문서가 원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진흙에 인장을 찍은 것을 '봉니(封泥)'라고 한다. 인장의 전성시대는 바로 봉니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진(秦), 한(漢) 시대이다. 그때는 인장도 돌에 새긴 게 아니라 금속 주물로 주조한 것이었다. 진흙에 찍어낸 글자의 형상이 옛스럽고 투박하다는 뜻에서 고졸미(古拙美)가 있다 하여, 현대 전각에서 그런 풍으로 디자인하여 새기게 되었다. 중국이 돈을 벌어 고고학 발굴에 엄청.. 2021. 11. 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