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소배압7

[귀주대첩 spinoff] 요사遼史 이국외기二國外記가 적록한 귀주대첩 원나라 때 편찬된 요사遼史는 24사 혹은 25사 중에서도 그 졸속성이 가장 심각하다는 비판을 듣거니와, 실제 내가 통독해 봐도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이상 가는 거란 통사는 지구상에 없다. 이 요사는 외국열전이 독특해서 유독 고려와 서하西夏 두 나라는 이국외기二國外記라 해서 별도로 독립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만큼 거란 국제교류사에서 두 왕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막강한 까닭이다. 물론 거란한테 가장 중요한 이웃 왕조는 宋이었지만, 그 송은 본사가 따로 있으므로, 이렇게 두 왕조만은 따로 독립해서 이렇게 특기한 것이다. 이 이국외기 중 고려를 보면, 두 왕조가 전쟁을 비롯해 교류한 역사를 편년체 식으로 정리했으니, 그 요긴함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에는 당연히 우리가 흔히 귀주대.. 2024. 2. 24.
[귀주대첩] (10) “도통은 소배압, 부통은 소허열” 지금까지 본 전쟁은 고려사랑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더 정확히는 그것을 정리한 조선초 이데올로기)이며, 이 전쟁이 거란 쪽에서는 어찌 기억되었을까? 그 흔적은 요사遼史 성종본기聖宗本紀와 이 전쟁에 종군한 사람들 열전에 남았으니 이를 살펴야 한다. 이 전쟁이 요사에서는 권16 본기 제16 성종聖宗7에 남았다. 이 전쟁을 일으킨 1018년, 고려 현종 9년은 거란으로서는 개태開泰 7년이라, 이해 3월 신축辛丑에 동북쪽 월리독越里篤과 부아리剖阿里·오리미奧裏米·포노리蒲奴里·철려鐵驪 등 5개 부部에 대해 세공歲貢으로 초피貂皮 6만5천 장과 말 300마리를 바치게 했다 하는데, 내가 아무리 봐도 이는 그 연말에 있을 고려 정벌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저들 5개 부는 동북쪽이라는 위치를 특정하는 것으로 봐도 .. 2024. 2. 23.
[귀주대첩] (9) “네 낯 가죽을 벗겨 죽이리라” 앞서 봤듯이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냅다 개경을 향해 남하했다. 심지어 서경도 오른편으로 돌린 채 남하했다. 이는 소배압 전술이 현종 사로잡기였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십만 거란군에 견주어 이십만을 동원한 고려군은 전력에 여유가 있었다. 일부는 거란군 꽁무니를 맹렬히 좇아 따라붙어 후미에서 들이쳤다. 강감찬은 그러는 한편 일부 부대는 빼돌려서 개경으로 서둘러 내려가게 했다. (1019년) 봄 정월 경신, 강감찬은 거란 병사들이 도성 가까이에 이르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서둘러 가서 경성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였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또한 병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고려사절요) 소배압은 쏜살같이 달렸다. 1월 3일에 벌써 .. 2024. 2. 23.
[귀주대첩] (8) 거란군 꽁무니를 좇는 이상한 전쟁 소손녕이 이끈 1차엔 80만, 성종이 친정한 2차엔 40만을 동원했다는 거란이 1018년 현종 9년 12월에 단행한 3차엔 고작 10만을 끌고 왔으니 규모로 보아 거란으로서는 전면전은 아니었지만 이건 다른 측면에서 봐얄 성 싶다. 거란으로서는 이 무렵 내부 사정으로 저 이상 되는 군대를 징발하기 힘들었다고 보거나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십만은 당시로서는 전면전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흔히 이 삼차전을 귀주대첩이라 하나 실상 이 전쟁은 최전방 흥화진에서부터 개경 근방까지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에서 크고작은 전투가 잇따랐으며 실상 귀주대첩은 그 마지막 승리를 말할 뿐이다. 이듬해 2월 1일 귀주대첩까지 3개월에서 약간 모자란 이 기간에 벌어진 모든 전투에서 고려는 완승했다. 특히 .. 2024. 2. 23.
[거란의 치맛바람] (12) 딸을 죽였다고 사위 소손녕을 죽여 순장한 장모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에는 소항덕蕭恆德, 곧 蕭손녕遜寧이 열전이 그의 친형 소배압蕭排押 열전 바로 뒤에 붙었거니와, 이에 의하면 소항덕은 통화 원년(983) 제5대 황제 경종景宗 야율현耶律賢과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 사이에서 난 월국공주越國公主한테 장가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어 주로 군사 분야에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물론 굴곡도 없지는 않아서 군사 발동을 잘못했다 해서 공신 칭호를 삭탈당하기도 한다. 통화統和 14년(996)에는 행군도부서行軍都部署가 되어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를 치고 개선했다. 문제는 이때 생겼다. 그의 열전에는 이렇게 적었다. (소항덕이 전장에서) 돌아오자 (부인 월국) 공주가 병이 들었다. 태후가 궁인宮人 현석賢釋을 보내 병 간호를 하게 하였는데 소항덕이 그와 사통하니 공주.. 2024. 2. 15.
소배압-손녕 형제한테 나란히 시집간 경종의 딸들 크게 3차에 걸친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군 수뇌를 형성하는 소씨蕭氏 형제, 곧 소배압蕭排押과 소손녕蕭遜寧(=소항덕蕭恆德)은 국구國舅 소부방少父房 후손들이라, 대대로 집안이 황비를 공급하며 위광을 누렸다. 물론 부침도 없지는 않아서 걸핏하면 한대 얻어맞고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삭탈관직되어 서민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저 두 소씨 형제를 흔히 부마도위駙馬都尉, 약칭하여 부마駙馬라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황제의 사위인 까닭이다. 본래 부마駙馬란 말 자체가 딸린 말이라는 뜻으로, 황제가 행차할 적에 지금 모는 말이 피곤에 지치거나 혹은 부상당했을 적과 같은 비상사태에 투입할 대타를 의미했으니 이것이 훗날 임금의 사위라는 뜻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요사遼史 소배압 열전에 이르기를 그가 위국공주衛國公主한테 .. 2024. 2. 1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