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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5) 김영나 시대의 박물관(3) 국박 뿌리를 흔들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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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품 앞에 선 김영나. 그것은 작은 시작이었다.

 
김영나의 박물관장 재임 5년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나는 ‘박물관의 미술관화’ 이것 하나로 축약할 수 있다고 본다.

더욱 정확히는 재임 기간 내내 그는 국립박물관, 특히 중앙박물관을 서양미술관으로 바꾸려고 했다. 

실제 전시회 중에서도 박물관이 총력을 쏟아부은 소위 블록버스터 기획전은 서양미술을 주제 혹은 소재로 하는 일이 많았으며, 전시 환경 역시 그에 맞추어 개편하고자 했다. 

이는 결국 박물관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켰으며, 나아가 유사 문화기관에서의 비난을 야기했다. 

그의 치하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가람미술관 혹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아니냐는 비판을 사기도 했다.

나는 그가 추진한 서양미술관화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관점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하기야 박물관 미술관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주로 오래된 고고미술품을, 그것도 국내품을 주로 취급하는 박물관이라 해서 서양미술을 취급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다만,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이 곤란하다는 점에서 그가 나아고자 한 방향은 분명 문제의 소지는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박물관이 서양미술을 전시할 수는 있지만, 미술관에서 한국의 고고미술품을 전시한다면 아마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길길이 날뛰며 막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의 취임은 국립중앙박물관 근간을 흔들었다.


결국 그가 추진한 서양미술관화는 유사 문화기관간 심각한 불균형을 더욱 강화했으며, 더욱 정밀히 말한다면 국립중앙박물관이 무한대 영역 확장을 통해 종래의 미술관 분야를 심각히 침식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양화 전시가 주류를 이뤘지만, 정작 그 내부에는 서양미술사 전공 학예직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나는 본다. 

저 인력 문제는 결국 그의 재임기간 서양미술사 전공 선발로 귀착했지만 이 과정 역시 훗날 계속 구설에 휘말리게 된다.

참, 김리나-영나 자매 얘기가 나온 김에 이들이 자매 문화재위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문화재청은 2007년에 이어 2011년에도 두 자매를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됐다. 

2011년의 경우 언니가 동산문화재분과 위원이 되고 동생은 근대문화재분과 위원으로 앉았다.

(2016.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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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나 시대가 남긴 유산은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저 박물관의 서양미술관화가 어떠한 모습으로 귀결할지 저때는 아무도 몰랐다. 

그가 떠나고 10년이 흐른 지금, 그가 남긴 여진은 폭풍이 되고 쓰나미가 되었다. 

온통 서양미술전시다. 

한 번 고기 맛 본 국박은 그 고기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5) 김영나 시대의 박물관 (2) 그와 정형민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4%B9-29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5) 김영나 시대의 박물관 (2) 그와 정형민

그렇다면 정부는 왜 굳이 두 자매 중에서도 김영나를 택했을까? 확인된 바는 없지만, 김리나의 나이가 문제였다는 지적이 있다. 김영나가 관장에 취임했을 때 이미 김리나는 홍익대를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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