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앞 문순득 관련 기사 덧붙여 과거 옛 내 기사 중에 덤으로 아래가 걸려 전재한다.
내가 기자로서 이런 기사도 썼나 한다.
영혼이 없어 써서 그런가? 그 옛날 일이 다 흐리멍덩하다.
Out of sight out of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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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초정의 북학파 사상, 전라도까지 침투"
기사전송 2005-06-29 05:00
안대회 교수, 다산 제자 이강회 연구 통해 규명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우리는 매양 한산의 승리(閑山之勝)를 사방에 요란하게 뻐기면서 말하기를 우리 배는 질박하고 저네들 배는 정교하고 부드러우니 질박한 배로 부드러운 배를 부딛치면 도처에서 부숴지기 때문에 이겼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지혜와 덕을 겸비한 이충무(李忠武)가 출현하여 출기입신(出奇入神)한 전략으로 적의 예봉을 꺾었지 어찌 전선(戰船) 때문이었겠는가? 원균(元均)이 패한 일은 우리 전선으로 한 일이 아닌가?"
누구의 말일까? 그것을 파헤치기 전에 이 글에서 말하는 몇 가지를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한산의 승리'란 조선 선조 25년(1592) 음력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왜군을 대파한 일을 말한다.
따라서 이충무(李忠武)란 사후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순신(李舜臣)을 가리킨다.
이 글은 이강회(李綱會)라는 사람이 남긴 글이다.
그렇다면 이강회는 누구인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18년 동안 가르친 제자 중에서도 가장 아낀 인물이다.
어디에 그런 증거가 있는가?
다산은 강진 시절 제자들에 관해 기록한 '다신계절목'(茶神契節目)이란 글을 남기는데 여기에서 이강회는 그의 형인 이유회(李維會.1784-1830)라는 인물과 함께 제일 첫머리에 올라가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자(字)가 굉보(紘甫)이며 기유년(己酉年), 즉, 서기 1789년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다산보다 27살 어렸다.
이런 이강회가 스승인 다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다산의 다른 글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인근 흑산도에서 같은 유배 신세인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굉보(紘父)가 과거시험을 보고 오더니만 발분해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안경을 쓰고는 '논어'(論語)의 저술에 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고 하고 있다.
제자에게 자극을 받아 완성한 다산 고증학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는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였다.
다산 저술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는 이런 이강회에 대해 지금까지 성균관대 임형택 교수가 2000년에 출간된 '실사구시의 한국학'(창작과비평사)라는 책에서 다산이 아낀 제자 중 한 명이라는 언급 정도 외에 이렇다 할 만한 주목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더 이상 이강회라는 인물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미지의 인물에 대한 사상과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가 30대에 남긴 '유암총서'(柳菴叢書)라든가 '운곡잡저'(雲谷雜著)를 비롯한 일련의 저작이 대거 발굴됐기 때문이다.
2002년 9월, 종래 이름만 알려져 있다가 실물이 출현함으로써 학술계를 떠들썩하게 한 '송정사의'(松政私議)라는 글이 공개됐다.
발견자는 서울 세화고 생물교사인 이태원 씨였다.
조선후기 소나무 삼림 정책을 통렬히 비판한 이 글은 '운곡잡저'라는 글 뭉치에 들어 있었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는 송정사의는 물론이고 그것이 포함된 운곡잡저와 또 다른 이강회 저작집인 유암총서 전체를 주목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이름만 알려져 있던 다산의 수제자 이강회가 자기 글을 중심으로 다산과 정약전의 글까지 일부 포함해 엮은 저작집이었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이강회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성과를 지난 11일 한국실학학회가 성균관대에서 주최한 2005년도 하계학술발표대회에서 '다산 제자 이강회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 선설(船說)ㆍ거설(車說)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통해 공개했다.
선설과 거설은 각각 배와 수레에 관한 전문 논문이다.
안 교수에 의하면 이 중 선설은 현재까지 발견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 관계 전문 논고라고 한다.
이들 두 글을 안 교수가 중점 검토한 결과 이강회는 실생활에 소용이 되는 이용후생과 이를 발판으로 부국강병을 주창한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국강병을 위한 요체로 이강회는 중국이나 일본 배에 비해 낙후하기 짝이 없는 조선 배를 '현대식'으로 개혁해야 하며, 수레 또한 매우 중시했다.
지금까지 조선사람들이 한산대첩을 걸핏하면 이웃나라에 들먹거리면서 그런 대첩의 원인이 적선(敵船)에 대한 조선 선박의 무차별 '박치기' 전략에 있었던 것이양 뻐기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바로 선설(船說)에서 주창된 내용이다.
이강회의 이런 사상적 흐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안 교수는 물론 스승인 다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으나, 그 뿌리를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북학파 계열에 속하는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에게 닿아 있음을 밝혀냈다.
이를 증명하듯 1818년 11월에 쓴 '운곡선설'(雲谷船說) 발문에서 이강회는 연암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초정(楚亭)의 북학의(北學議)를 칭송하면서 그들을 가리켜 "두 분은 도를 논한 분들이라 말해도 좋다"고 극찬하고 있다.
안 교수는 "이강회를 통해 연암이 대표하는 북학파의 실학사상이 단순히 찻잔 속 물결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 단계를 거쳐 저 먼 변방 전라도 해안지역까지 침투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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