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여기 여러 번 쓴 것 같지만,
우리나라 실학의 역사적 의의는
밑바닥부터 다시 봐야 할 시기가 결국 올 것이다.
실학을 한국사에서는
소위 말하는 자주적 근대의 맹아로 설정되어 있는데,
실학은 근대적 맹아가 아니다.
단언컨대 우리나라 실학자 중에는
근대적 맹아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두 기존의 성리학자의 체계 속에서 파악 가능한 인물들이며
그 사상 역시 성리학에서 파생된 것으로
전혀 근대적이 아니다.
합리론과 근대적 맹아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합리적 사고는 근대적 맹아가 아니라,
성리학적 사유에서 이미 배태된 개념이며
성리학적 사유를 그 자체 근대적 맹아로 해석할 수는 없다.
다시말해서 이들 실학자 사이에서 합리적 사유의 흔적이 나온다 해도,
그것은 근대적 맹아가 아니라, 성리학적 사유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의 언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다산-.
위대한 학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근대적 맹아, 근대적 사유의 학자로는 볼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엔 성리학자의 가장 마지막 단계의 학자라고 위치시키는 것이 맞고
조선성리학의 황혼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다산이 이럴진데 그 외 다른 실학자들은 모두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을 우리가 근대의 맹아라고 부를 것인가?
이것부터 먼저 냉정한 정의가 있어야 비로소 실학을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구체제를 비판했다고 해서 바로 근대의 맹아라는 타이틀을 안겨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당장 조선시대 구체제를 대체하고 출현해야 할 실학적 토지제도를 보라.
그것이 어떻게 근대적이라는 말인가?
아래에 링크시킨 글에 실학자의 토지제도 개혁론이 있다.
근대적인지 한번 다시 봐주기 바란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71_0070_0040_0020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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