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kakaocdn.net/dn/biCQ2S/btsLjlRJcyK/VQYrn66vnm3aNYUcjD8yx1/tfile.jpg)
이건 뭐 요새 고고학 관련 소식은 주종이 배포 기관에서 써준 대로 긁어다 붙이는 수준이라 한심하기 짝이 없어 이럴 거 같음 언론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전남 함평군 발 함평 진양리 화동고분군 발굴 성과도 그러해서,
함평군에서는 마치 자기네가 직접 발굴한 것처럼 해서 보도자료를 포장했으니,
그럴 리는 없고 관련 보도를 읽어봐도 도대체 어느 기관에다 의로해서 조사했는지 가장 기본하는 정보조차 보이지 아니한다.
![](https://blog.kakaocdn.net/dn/bDWyuF/btsLiWLqFlZ/QmDttyCeO05nhmUNRCuhZ0/tfile.jpg)
암튼 이에 의하면 보존 정비계획 수립과 역사문화자원 활용을 표방하며 어느 기관이 발굴을 수주해서
지난 10월 이래 개중에서도 1호분이라고 이름한 무덤을 파제낀 결과(보존정비 수립하는데 왜 파나? 암튼)
첫째 이 무덤 전반하는 명세서를 확보했으니 사람으로 치면 키 몸무게 전반하는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는 것이니,
이건 건강검진할 때 도입부에 처음 실시하는 피뽑기까지 과정과 똑같아서
봉분 지름 16m 정도로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은 둥그니,
그 내부는 무덤방[玄室]과 출입시설[羨道]을 갖춘 전형하는 백제(사비)시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임을 확인하되,
![](https://blog.kakaocdn.net/dn/vJGG1/btsLh5bAO4d/aXrQqD7G6byZNtNiNpYCd0/tfile.jpg)
무덤방은 봉분 하나에다가 두 개를 쌍둥이처럼 썼다니 부부를 묻었거나 아니면 일가족 무덤으로 썼을 것이다.
뭐 방 하나에 쳐박지 왜 돈 많이 들어가는 저런 식으로 만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놉을 했으면 두 배로 노임이 들고 막걸리가 얼마야?
그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니 저러지 않았겠는가?
![](https://blog.kakaocdn.net/dn/nWFMt/btsLjGgWBQD/ZVPXUCRfYevYRMGnkQdt80/tfile.jpg)
품과 무덤 구조 혹은 그 껴묻거리는 비례하기 마련이다.
이 평범성을 이제는 심각히 접근할 때다.
왜?
실제로 그 껴묻거리 양상을 보면 이곳에 묻힌 사람 보통내기 부자가 아니었다.
동네 이장 혹은 면장 혹은 조합장 혹은 지서장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다.
초대형 지주이거나 이곳 상업을 독점한 토호였을 것이다.
무덤방은 대형 판석을 다듬어 만들었다자나? 돈이 얼마야?
이를 조사단은 당시의 정교한 석재 가공 기술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는데
웃기는 소리.
쩐주가 돈이 많으면 뭘 못하겠는가?
이를 정교한 석재 가공기술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작 의뢰한 사람 주체로 봐야 한다.
이런 돌방무덤은 거의 백퍼 도굴됐는데, 이곳 역시 그런 양상이 두드러진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건진 물건이 중요해서
조사단에서는 두 돌방을 각각 1호와 2호라는 번호를 붙여 구분한 모양인데,
아마도 1호 돌방일 듯한데,
그에서는 출입구 쌓인 흙(아마 도굴 과정에서 쌓였거나 그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에서 육각형에 꽃무늬를 새긴 금동판 쪼가리가 드러났다.
이 금동판 생긴 모양새 보면 거의 금동관 같다.
실제 조사단에서도 인근 함평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과 유사함을 든다.
봐라!
금동관을 쓸 정도로 묻힌 사람 혹은 그 가문은 떵떵거렸지 아니한가?
2호 돌방에서는 길이 99cm인 큰 칼과 은실로 용무늬를 그려 넣은 칼집 장식이 드러났다.
이걸로 보면 두 돌방을 차지한 사람은 부부 관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부와 권력을 세습한 부자인가?
그 각각하는 무덤방에는 그네들 부부가 묻혔을까?
암튼 기타 이것 말고도 금동제관못과 청동족집게, 은제꾸미개, 흑옥과 같은 물건들이 나왔다.
몽땅 털리고도 저런 부스러기를 남긴 데다.
이 무덤 만든 시기를 언제로 봤는지 모르겠지만
사비시대 백제를 운운했으므로 6세기 중반 이래 7세기 중반이 되겠다.
이럴 때는 6~7세기 어간이라 하면 된다.
뭐 이러고도 계속 마한 타령인데, 그러겠지?
이때는 완전히 백제화한 뒤라고?
에라이, 마한이 어딨어?
나아가 이 무덤도 그렇고 이렇게 당시 중앙을 기준으로 백제 역시 지방 곳곳에 이런 떼부자 무덤이 포진하는데,
고고학은 그 부와 권력의 원천을 파헤쳐야 한다.
매양 안이하게 해상 거점 무역 장악 이런 거지 발싸개 같은 설명은 집어치고,
그 해상 무역이 뭔지를 밝혀내야 한다.
하다못해 고등어 장사를 했는지 멸치어장을 했는지 이런 구체하는 양상을 밝혀내야 한다.
어케?
찾아보면 방법 다 있고 돌파구 있다.
안 해 보니 모를 뿐이지 한 번 해 보면 거칠 것도 없다.
'NEWS & THES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2 항저우 풍경] (1) 중국미술학원中國美術學院 BY 장남원 (33) | 2024.12.17 |
---|---|
4천 년 전 영국의 집단학살 (31) | 2024.12.16 |
전북 순창서 백제 은화관식 출토 (34) | 2024.12.13 |
발굴시대는 끝났다, 이젠 리비전의 시대 - 부여 송국리 유적의 경우 (31) | 2024.12.12 |
왜 하야가 아닌 탄핵을 선택하는가? 해직자가 증언한다 (30) | 2024.1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