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에서도 썼듯이 조선시대 한성부 발굴 현장 지층에서 회충 편충알이 발견되는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사의 세부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흥미로운 부분이 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위 유럽 중세 대도시 풍경 그림을 보자. 창문 위에 여인이 거리로 오물을 쏟아 붓는다.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이와 아주 비슷한 상황이 우리 연구에서도 확인되었다.
당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신영문 선생 요청으로 종묘광장-제생동천 발굴현장으로 출동한것이 2010년. 나가 보니 발굴은 잘 진행되어 우리가 기생충 샘플링만 하면 될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당시 현장 메모-.
이 발굴현장을 이해하기 위해 2009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해 보자 (윤완준 기자)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앞에서 피맛길(골) 옆을 유유히 흘렀던 조선시대 인공하천인 회동·제생동천의 흔적과 15∼20세기 시대별 제방 일부가 발견됐다. 왕이 종묘에 행차할 때 건넜던 회동·제생동천 다리인 종묘전교(宗廟前橋)의 돌 부재(건축물 뼈대를 이루는 재료)들도 나왔다. 수해를 막기 위해 종묘 앞으로 물길을 돌렸던 조선시대 인공하천이 발굴 조사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회동·제생동천은 조선왕조실록과 고지도로만 존재가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16일 서울역사박물관의 발굴조사 현장(종묘 앞 종묘광장)을 찾아 이를 확인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날 발굴 성과를 전문가들에게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회동·제생동천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가회동 인근인 북촌 가회방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흘러 청계천과 합류했지만 홍수에 따른 민가 피해를 막기 위해 세종 대에 종묘 앞으로 인공제방을 만들어 동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회동·제생동천은 도시화 과정에서 매립돼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시위 장소나 노인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종묘광장 땅 밑에도 조선의 역사는 살아 숨쉬고 있었다. 지하 3m와 2.3m 지점에서 두 차례 조성된 회동·제생동천 초기(15∼16세기) 제방 시설이 나왔다. 나무 말뚝으로 물막이 구조를 만들고 흙과 유기물을 채웠다. 지하 1.9m의 17∼18세기 제방은 돌로 만들었다. 19세기의 석축 제방(지하 1.5m)과 일제강점기에 만든 돌 제방(지하 1.2m)도 차례로 나와 인공하천의 시대별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회동·제생동천과 나란히 한 길이 피맛길(서민들이 고관들을 피해 다니던 길에서 유래)이었다. 나무 말뚝에서 석축으로의 제방 변화는 종묘 앞 피맛길 형성 시기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서울역사박물관 신영문 학예연구사는 “17∼18세기 피맛길에 서민들의 발길이 늘면서 제방의 안전성을 위해 돌 제방으로 바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회동·제생동천과 피맛길 너머로는(도로 쪽) 시전행랑 터가 발견됐다. 시전행랑은 조선시대 종로를 중심으로 설치한 상설시장의 점포 건물이다. 정면 2칸(7.9m), 측면 1칸(3.4m)의 온전한 시전행랑 터 1채를 비롯해 행랑 터 3채에서 온돌, 마루, 창고가 확인됐다.
이로써 조선시대 서민의 애환이 담긴 종로거리의 풍경을 재현할 수 있게 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재구성한 광경은 이렇다. 종묘 앞에 민가들이 밀집했으며 그 앞으로 마실 물을 찾고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회동·제생동천이 흘렀다. 하천 옆 피맛길에는 양반을 피해 걸음을 재촉하는 서민들이 오갔고, 시전행랑 상인들의 시끌벅적한 호객이 벌어졌다. 종묘에 행차한 왕이 종묘전교를 건널 때면 서민들은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바닥에 엎드렸을 것이다."
회동천, 제생동천은 지금은 사라진 물길이다
기사에서 인용된 대로 우리가 채취해야 할 시료는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퇴적층 토양시료였다.
이 발굴현장 작업이 흥미로왔던 점은 우리가 시료를 채취한 곳이 개인 집이 있고 그 집 사이를 지나는 골목, 그리고 골목 길을 따라 흐른 실개천이 제생동천과 합류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런 구역이었던 것이다.
C번 사진이 우리가 샘플링 한 구역을 보여준다. 개인집 (Private House), 골목 (Alley), 그리고 골목 길에 있는 배수구 (Side gutter), 그리고 여기서 흘러나간 물이 제생동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이다 (개천물의 방향이 노란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발굴 현장에서 실시된 기생충 검사는 조선시대 골목길의 기생충란 오염 현황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구역도 광화문 거리, 광화문 궁장, 그리고 군기시 유적과 마찬가지로 기생충란이 발견되어 다른 사대문 안 유적처럼 당시 사람들이 감염되어 배출한 기생충란이 토양을 오염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충란 오염이 개인 집 구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골목길, 골목길 배수구, 그리고 개천 바닥에서만 발견된것이다.
우리는 이 결과를 "집에 살던 사람들이 오물을 집안에서는 버리지 않고 골목길이나 배수구, 개천으로 투기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해석하였다.
흔히 NIMBY라고 이야기 하는 "내집 마당은 깨끗이" 라는 정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였던 셈이다.
이 디오라마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조사했던 재생동천 구역과 유사한 정경 같아 사진을 찍었다. 골목이 있고 그 골목측구가 잘 보인다 (별표 찍힌 부분) 측구를 따라 흐른 물은 더 큰 개천으로 합류한다 (사진 위 부분). 아마도 이 디오라마에서도 사진 왼쪽은 개인 가정집인것 같은데 이 가정집 주인도 오물을 집안에는 버리지 않고 골목이나 개천에 버렸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서울 지역 고기생충 조사를 하면서 놀란것은 충란이 많이 발견된다거나 조사하는 곳에서 대부분 발견된다든가 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우리가 사실 놀란 부분은 상식적으로 발견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구역에서도 충란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곳이 세종대왕 동상 아래, 그리고 광화문 궁장이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정치 문화적 중심지의 하나이다.
오늘날도 어마어마하게 넓은 길이 그 앞에 나 있지만 이 점은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세종대왕 동상 자리는 조선시대에는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거리 양측에 정부기관인 육조건물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백주대로에서도 기생충란이 많이 나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점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계속)
조선시대에도 광화문 앞 육조거리는 번화가였다. 조선왕조의 황혼기를 찍은 이 한장의 사진에 우리가 샘플링을 했던 위치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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