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20세기 이전 사람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면 어딜까.
역시 행정 수도인 백제 사비성, 신라 경주 (월성 해자) 등을 들 수 있겠고, 행정치소 역할을 한 삼국시대 산성도 이에 포함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이런 지역에 대해 고기생충학 검사를 해보면 거의 예외 없이 발굴 현장 옛 지층에서 당시 기생충란이 많이 발견되었다. 사실 그 당시 인구가 고도로 밀집된 지역에 살면 회충, 편충 등 기생충란이 토양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그 만큼 기생충 감염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더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기생충 감염에 대한 의학적 지식 수준이 낮고 예방법이나 치료법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그 시대에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률은 어느나라나 할 것 없이 높았다. 그리고 그렇게 감염된 사람들이 좁은 지역에 모여 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곳 토양은 배출된 기생충란에 오염되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이나 동아시아에서만 보는 현상도 아니고 유럽 등 다른 어떤 나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20세기 들어 세계 각국 고기생충학 연구에서 잘 밝혀졌다.
따라서 19세기 이전 발굴 현장 옛 지층에서 기생충란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그 지역 인구밀도가 아주 높은 인구 밀집지라는 의미일 뿐 다른 의미는 크지 않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똥바다다 아니다" 이런것은 별로 중요한 이야깃 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창녕 화왕산성. 2012년 우리 연구진 조사 때 내부 삼국시대 지층에서 기생충란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살았던 시기가 한때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대문 안 (한성부)는 어땠을까.
한성부는 조선후기 들어오면 그 인구가 무려 20만명으로 급증했다 (이 정도 규모의 대도시는 17세기 당시 전세계적으로도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니었다. 산업혁명 직전 런던의 17세기 인구가 20만명).
따라서 한성부 안 인구 밀도는 상상 외로 높았을 것이다. 조선 전기에 비해 두 배로 인구가 급증했으므로 도시가 이를 다 수용하기에는 힘이 부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서울 사대문 안 발굴현장에서 기생충란이 많이 발견된다 해서 그 자체로 크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한성부의 인구변화. 17세기 이후 인구가 급증하여 20만에 육박하게 된다. 이 정도의 인구는 이미 당시 한성부의 여러가지 입지로 볼때 지탱하기 어려운 수준의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난맥상을 영조대 청계천 준설 직전의 상황에서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인구 밀집도가 높은 대도시가 17세기를 전후하여 발전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보는 현상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경우 대도시들이 17세기 들어 그 규모가 일제히 확대되었는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표적인 예가 조선의 漢城, 일본의 에도(江戶), 오사카(大阪), 쿄토(京都) 등이다.
조선왕국 수도인 漢城府는 조선 초기만 해도 인구 10만 정도 내외였지만 조선후기 들어 인구가 20만 여명으로 급증하여 세계적으로도 큰 규모의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에도가 100만, 오사카, 쿄토가 각각 30만 씩의 막대한 인구를 자랑하게 되었는데, 동아시아 각국에서 17세기가 되어 출현한 이러한 거대 도시는 사회 각 분야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이들 도시들이 이 시기에 거대화 된 상황은 위 (조선 한성부)와 아래 (일본 에도, 오사카, 쿄토) 칸에 넣어 놓은 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당시 동아시아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인구 밀집도가 매우 높은 지역의 하나였을 것이다.
일본 도시의 변화. 17-19세기 거대 도시화 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1850년. 에도는 인구 백만, 오사카와 쿄토가 각각 30만에 육박하였다. 1873년에 에도의 인구가 격감한 것은 아마도 메이지유신 후 에도로 참근교대차 올라와 있던 각 번의 영주와 번사들이 귀향 하면서 말미암은것 아닐까 싶은데 자세하지는 않다.
이처럼 좁은 지역 도시에 많은 인구가 집중해서 살면서 고도의 소비생활을 향유하는 도시민 문화를 성립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구집중에 따른 여러 가지 부수적인 사회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부수적 문제 중에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1865년. 이미 거대 도시화 해버린 일본의 수도 에도. 우리나라 한성부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 이제 서울 사대문 안 (한성부) 기생충란 이야기를 좀 해보자.
최근에는 사대문 안에 공사장을 거의 볼 수 없다시피 한데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이 지역에 공사가 꽤 있었고 그 공사장마다 발굴기관들이 들어가 유적 조사를 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사대문 안 지역 그 4미터 아래에 과거 조선시대 한성부 시절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여 화제가 되었던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 당시 우리 연구실도 때는 이때다 그 발굴 현장을 누비며 기생충학적 검사를 수행할 샘플을 활발히 수집하고 있었다.
우리가 당시 여러 발굴 기관 협조를 얻어 시료를 채취한 곳은 다음과 같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님 앉아계시는 장소 근처. (맞나?) 박준범 샘께서 열심히 파고 계셨죠.
현재 잘 정비 된 광화문 궁장 밑. 당시 문화재 연구소 (최인화 샘) 가 발굴하고 있었음.
군기시 자리 (박준범 샘)
그리고 뭔가 굉장했던 종묘광장. 재생동천 (왼쪽은 신영문, 오른쪽은 박상빈 선생)
광화문 궁장지. 샘플 수습. 오른쪽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인숙 선생이다.
그리고 뭐 결론을 말하자면, 예상대로 이 발굴 현장의 조선시대 지층 샘플 모두에서 기생충란이 나왔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일반 독자들은 놀랐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 연구팀 중에는 이 결과를 보고 놀란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당시 한성부 규모와 인구 밀집 정도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거기서 수집한 시료에서는 기생충란이 발견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이런 추측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 발굴현장에서도 비슷한 연구에서 유사한 결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근대 이전 중세도시 위생상황이라는 것은 어느나라나 거의 대동소이했다. 유럽 등 다른 나라 도시의 역사적 기술을 살펴보면,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주택에 일정한 측간 시설이 없어 아무 곳에서나 배변하는 것이 거의 상례화했으며 (Blume, 2005), 인구밀도가 높은 중세 유럽 도시의 경우 가축들이 길거리를 배회한다거나 가정 오수를 거리에 투척하여 버려 그 오물은 비가 많이 올 때에나 씻겨 나갈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Easton, 1964).
중세 런던. 오물을 길로 마구 버리고 있다
유럽의 당시 자세한 상황은-.
중세 런던의 모습을 설명한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길-.
https://www.historyextra.com/period/medieval/medieval-londons-worst-smells/
요약하면 조선의 당시 한양 도성 내 거리 모습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며 비슷한 시기 다른 나라 대도시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우리같은 고기생충학자에게는 이는 "당연히 예측 그대로의 결과" 였고 특별히 우리에게 창피한 사실을 찾아 낸 보고가 아니었다. (계속)
*사실 이렇게 썼지만 우리 연구를 본 일반 대중의 창피한 기분도 이해 안가는 바는 아니다. 기생충 감염률이 99.99%인 나라에서도 채변검사 결과 알려주는 날 (기생충 약 복용하는 날) 똑같이 기생충 있는 녀석이 같은 반 급우를 향해 "얘 기생충 있대요~!!" 하고 소리 지르면 당사자가 창피한것이야 마찬가지일테니. 당시 모든 나라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해도 내가 기생충이 있다는데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이겠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을 고기생충학적 연구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 낸 나라가 많지 않으니... 고기생충학 연구는 이런 측면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고기생충학적 연구라는것이 좀 먹고 살만한 소위 선진국이 아니면 거의 제대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런 보고가 가능하다는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좀 사는 나라 반열에 들어갔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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