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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동검 칼집을 보면
참 공을 많이 들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저 칼집에 꽂은 칼 도대체 몇 번이나 뽑아 사람들 보는 데서 휘둘렀을까.
일본 에도시대에는 사무라이 칼이 완전히 신분의 상징이 되어
칼을 차느냐 아니냐가 사람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지만
반대로 칼은 좀체로 칼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론적으로는 무사 아닌자가 무사 앞에서 까불면 베어 버려도 된다고 했지만
그 말 곧이 그대로 믿고 정말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였다가는 개역되고 대대 물려 받을 녹봉을 날릴 가능성이 있어
사무라이 앞에서 건달들이 놀려먹어도 좀체 칼을 뽑지 못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위세품이라면 칼 그 자체가 아니라 칼집과 칼자루이다.
그 안에는 뭐를 넣어놨는지 아무도 신경 안 썼을 것이다.
나무 칼일 수도, 돌칼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칼 뽑지 않아도 칼집을 차고 다니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분이 상징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 editor's note ***
전주 상림리 동검과 관련해 그것이 진짜로 위세품 혹은 신을 위한 공헌품이라면 칼보다 더 중요한 칼집은 어디 있느냐 이걸 묻는 것이다.
이 문제도 다뤄볼 생각이었으나, 마침 신 교수님께서 다루었으므로 이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면서 곁다리로 짚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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