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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나오는 주장 중에 조몬 농경론이라는 게 있다.
조몬시대, 흔히 생각하듯이 수렵채집만 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이긴 하지만 초보적 농경이 있었다는 것으로
잡곡이나 도작 농경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팥이라던가 녹두 등 쉬운 작물 재배는 있었다는 것인데,
이런 작물도 아마도 한반도에서 들어온 것일 것이다, 라는 전제를 깔기는 한다.
일본에서는 왜 이렇게 조몬농경론縄文農耕論에 집착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에서 신석기시대 농경론을 입증하기 위해 애쓰는 정도보다
일본에서 조몬 농경론을 입증하고자 하는 시도가 훨씬 집요한 것 같다.
글쎄-.
필자가 보기엔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초보적 농경이 있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이게 뭐 대단한 농경이 아니라는 것은 그쪽도 잘 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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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러한 초보적 농경을 조몬시대에 설정해 두면 뭐가 달라지는가 하면-.
야요이시대 도작 농경이 한반도에서 전파되어 온 후
조몬인이 이에 어느 정도로 참여하여 농경민으로 전환했는가에 대해 밑밥을 깔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보적인 농경이라도 하고 있었어야 도작이 침투해오던 시대,
농경민으로 전환이 어느 정도 조몬인의 주도적 역할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기 쉽기 때문에-.
그런데-.
필자는 과연 조몬인이 야요이시대 그렇게 까지 주도적으로 도작 농경으로의 전환에 참여했을지 좀 의문이긴 하다.
이유는 첫 번째로-.
조몬인과 거의 유사한 생산방식을 가지고 살던 에미시는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도 결국 농경민으로 전환하지 않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밀려갔다는 점-.
또 하나는 야요이시대 대륙에서 농경민이 이주해오던 것과 거의 비슷한 양상의
유럽 초기 농경에 대한 논쟁에서,
현재는 근동 지역의 농경민이 유럽의 선주 수렵채집민을 구축하면서 농경을 이식한 것이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는 점 등이다.
필자는 현대 일본인, 도작사회의 성립에 있어서
대륙으로부터의 이주민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조몬인의 참여도 있었기는 했겠지만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본다.
수렵민에서 농경민으로의 전환은 우리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게 쉽다면 왜 북미원주민이 농경민으로 전환하지 않고 소멸의 길을 걸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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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죽자고 파고드는 데는 일본학자들 쪽이 한국쪽보다는 훨씬 집요하다.
물론 이것이 제대로 된 학술활동이냐 하는데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렇게 미싱링크를 찾아 밑밥을 깔고 죽도록 파고 드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학자들의 조로 현상 때문이기도 하고
대개 파고들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지리멸렬 끝나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이런 부분의 집요함을 조금 더 배양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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