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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5) 테크노크랏의 전성시대

by taeshik.kim 202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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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장영실은 이런 광물을 잘 다뤘다.

 
5. 테크노크랏의 전성시대   

이를 즈음해 그 전후 약 10년이 내가 보기에는 장영실의 전성시대다. 바로 앞에서 말하는 자격루는 실제는 2년 뒤인 세종 16년, 1434년 7월 1일을 기해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해 쓰기 시작했다. 이 보루각 위치를 나는 모르겠다. 아마 경복궁 근처 어디일 것이다.  

이 날짜 실록에는 “이날부터 비로소 새 누기(漏器)를 썼다”고 하면서 그 제작 및 작동 원리를 대서특필한다. 이에서 설명하는 원리를 과학 문외한인 내가 설명할 수는 없다. 이를 현대 과학자들도 제대로 복원해 내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경복궁 안 국립고궁박물관에 하나를 복원해 놓았다.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는 보루각(報漏閣)이라는 곳에다가 설치했다. 그러고는 지금의 천문연구원에 해당하는 서운관(書雲觀) 관리들에게 번갈아 숙직하게 하면서 감독하게 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후속 조치를 취했다.  

경회루 남문과 월화문(月華門)·근정문(勤政門)에는 각각 금고(金鼓)를 설치하고, 광화문에 대종고(大鍾鼓)를 세워서, 당일 밤에 각 문의 쇠북을 맡은 자가 목인(木人)의 금고 소리를 듣고는 차례로 전하여 친다. 영추문(迎秋門)에도 큰 북을 세우고, 오시에 목인의 북소리를 듣고 또한 북을 치고, 광화문의 북을 맡은 자도 전하여 북을 친다. 경회루 남문과 영추문·광화문은 서운관생이 맡고, 나머지 문은 각각 그 문에 숙직하는 갑사들이 맡았다. 

궁궐 각 문에다가 북과 종을 설치해서 자격루에 맞추어 시각을 알렸다는 것이다. 정오라든가 통금 시간, 혹은 해금 시간 등이 되면 자격루에 설치한 목인, 다시 말해 나무로 만든 사람 모양 인형이 자동으로 그 시각임을 알렸다. 그 소리를 듣고 궁궐 각 문에서도 동시에 시각을 알렸다는 것이다. 

이에서 말하는 북과 종은 각각 통금 시간과 해금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안다.  

한데 이 목인을 장영실이 제작했다고 한다. 

임금이 또 시간을 알리는 자가 혼란됨을 면치 못할까 염려하여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사신 목인(司辰木人)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하였으니, 그 제도는 아래와 같다.(이하 줄임)  

사신 목인이란 글자 그대로는 시간을 맡은 나무 인형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이 대목 실록에는 다시금 목인을 만든 장영실에 대해 “동래현(東萊縣) 관노(官奴)인데 성품이 정교(精巧)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工匠) 일을 맡았다”고 부연했다.
 

연금술사. 장영실은 연금술까지 배우려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장영실이 어미 신분이 미천해 신분이 관노였으며, 애초에는 동래현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랬던 그가 어찌하여 이방원에게 발탁된 것이다. 

탄력을 받은 장영실은 이제는 금속활자 제작에도 관여한다. 세종 16년(1434) 7월 2일자에 수록된 사건 중 하나다. 

지중추원사 이천(李蕆)을 불러 의논하기를,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시고 큰 글자를 주조(鑄造)할 때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룩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태종께서는 억지로 우겨 만들게 하여, 여러 책을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폈으니 또한 거룩하지 아니하냐.

다만 초창기(草創期)이므로 제조가 정밀하지 못하여 매양 인쇄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먼저 밀랍을 판(板)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하지만 밀랍은 성질이 본디 부드러워 식자(植字)한 것이 굳지 못하여, 겨우 두어 장만 박으면 글자가 옮겨 쏠리고 많이 비뚤어져서 곧바로 바르게 바로잡아야 하므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내가 이 폐단을 생각하여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으나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板)을 만들고 주자(鑄字)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랍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이제 대군들이 큰 글자로 고쳐 만들어서 책을 박아 보자고 청하나 내가 생각하건대 근래 북쪽 정벌로 인하여 병기(兵器)를 많이 잃어서 동철(銅鐵)을 쓸 곳도 많으며, 더구나 이제 공장들이 각처에 나뉘어 있어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이 심히 번거롭고 많지마는 이 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고는 이에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직전(直殿) 김빈(金鑌)·호군 장영실(蔣英實)·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사인(舍人) 정척(鄭陟)·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경연에 간직한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騭)》·《논어》 등의 책 자형(字形)을 자본으로 삼아, 그 부족한 것을 진양대군(晉陽大君) 유(瑈)에게 쓰도록 하고, 주자(鑄字) 20여 만 자(字)를 만들어 이것으로 하루에 찍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니 자체(字體)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인쇄혁명이다. 금속활자는 고려시대에 발명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비로소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은 세종 때다. 그래서 이 기록은 세계 인쇄사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이때까지도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나오기도 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활자. 장영실은 활자 만드는 일에도 관여한 만능 테크노크랏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서양의 그것은 인쇄혁명에서 지적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한반도에서의 그것은 찻잔 속 태풍으로 그쳤다는 사실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시시각각 세계로 퍼지는 오늘과 같은 시대였다면, 세종은 그야말로 세계의 인쇄혁명을 이끈 선구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금속활자 혁명에서 장영실이 관여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 아쉽게도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어 장영실이라는 이름은 몇 년 뒤인 세종 19년 7월 6일 실록에 다시 나타난다. 이 날짜에는 “통사 김옥진(金玉振)을 시켜서 중국사람들인 지원리(池源里)와 김새(金璽) 등 일곱 사람을 요동으로 풀어 보냈다”고 하면서 그 내막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통사란 통역관이니 이 경우는 중국어 전문을 말한다. 

애초에 (조선 사람인) 김새가 야인에게 포로가 되어서는 오랫동안 북방에서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망쳐 (조선으로) 왔다. 김새는 성질이 백공(百工)의 일에 정교(精巧)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금은(金銀)을 제련(製鍊)하여 주홍(朱紅)의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荷葉綠)과 같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임금이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전습(傳習)하게 하였다. 
김새가 말하기를 ‘돌맹이를 제련하여 금과 은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곧 그의 말에 의거해서 널리 돌을 구해서 보이니 말하기를 ‘모두 진짜 돌이 아니다’고 해서 마침내 전습하지 못하였다. 단지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荷葉綠) 만드는 것을 배웠을 뿐이며, 주홍(朱紅)은 역시 전습하지 못했다. 

나라에서 그 재주를 사랑해서 머물러 있게 하려고 기생으로 아내를 삼게 하여 후하게 대접하니, 김새도 역시 기뻐하여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정부 대신 중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에 앞서 포로가 된 중국 사람이 북방에서 도망쳐 오면 즉시 중국에 풀어 보내니 그런 사람이 이제는 벌써 1천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는 것은 중국에 소문이 났는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대하는 성심에 누가 된다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니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초에 중국의 명령이 없어도 들여보낸 자가 벌써 1천인이 되었는데, 이번에 비록 보내지 않기로서니 무엇이 염려되겠으며, 하물며 이들 네 사람뿐이니 반드시 들여보낼 것이 없습니다’고 해서 두 가지 의논이 결정을 보지 못했으나 그 수종(隨從)한 사람의 족친들이 아직도 동녕위(東寧衛)에 살고 있어 끝내 자취를 숨길 수 없으므로 이때에 와서 풀어 보냈다. 

전문 기술자라 해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들이 도망친 사실을 중국에서는 알고 있으므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해서 보냈다는 말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물건 중에 하엽록(荷葉綠)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이 실록 번역자는 “모자의 꼭대기에 다는 연잎 모양의 파아란 장식물”이라고 풀었는데 참고 바란다. 

김새에 대한 이 기록은 실은 장영실 아버지가 조선에 정착한 과정일 수도 있어 주목을 요한다. 나는 앞서 여러 모로 보아 장영실 아비는 기술자인 듯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맞다면 김새한테도 똑같이 해당한다. 기술자를 이 땅에 붙잡아두고자 장가도 보냈으니, 그 처가 바로 기생이었다니 말이다. 
 

서양의 연금술사

 
김새가 구사한 기술은 실은 연단순鍊丹術이라 해서 연금술의 일종이다. 이는 중국에서 이미 2천 년전에 보이는 것으로 돌을 금과 은 같은 금속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기술이다. 종교로 보면 도교에서 주로 구사한다.

하지만 말만 그럴 듯했지 성공한 사람은 없다. 연금술이 지금 기준으로 허황되지만, 그런 무수한 실험에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과학이 태동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데 세종은 그가 구사한다는 연금술을 장영실에게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장영실이 적어도 광물학에 관한 한 임금의 전적인 신뢰를 받았음을 말해주는 보기라 하겠다.

앞서 나는 그가 광물학 전문가가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서도 그 추정은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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