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이 상대로 더 높은 여성이 신분이 상대로 낮은 남자한테 시집가는 일을 전통시대에는 하가下嫁라 한다.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를 보면 김유신은 만 60세가 된 655년, 태종무열왕 김춘추 딸 지소를 부인으로 맞았으니 이때 제아무리 김유신이라 해도 신분이 지소보다 낮아, 그것이 더 높은 공주 신분인 지소를 받드는 형식으로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저와 관련한 기록이 상대로 풍부한 조선시대를 봐도 사정은 비슷해 공주 혹은 옹주가 궁 밖 다른 남성을 찾아 가정을 꾸리는 일 역시 하가라 했다.
공주나 옹주의 출가와 관련해 우리가 비상히 보아야 할 대목은 그 신분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첫째 혈통이니 말할 것도 없이 왕의 피를 물려받아야 했다. 조선시대의 경우 그 어머니가 정식 왕비면 공주, 후궁이면 옹주라 해서 차별했다.
문제는 신분을 규정하는 데 혈통이 전부인가 하는 점이다. 이 대목을 사람들이 간과했다. 저 혈통은 개돼지도 한달을 교육하면 아는 일이라 그 다음이 더 중요한데 이를 간과하고 말았다.
그렇담 신분을 결정하는 두번째는 무엇인가? 주거다. 다시 말해 어디에 사느냐를 신분이 결정했다.
공주나 옹주가 하가한다는 것은 주거를 옮긴다는 뜻이다. 결혼 이전 저들의 주거는 宮이다. 하가는 궁을 떠나는 일이다. 이를
출궁出宮
이라 한다.
출궁은 단순히 이삿짐 싸서 옮기는 일이 아니다. 주거는 그 거주자의 신분을 결정하기에 그것을 옮기는 일은 신분의 변화를 초래한다. 하가라 했으니 당연히 결혼한 공주나 옹주는 그 신분을 잃는다. 잃고는 그 남편을 따른다.
출가 이후에도 공주나 옹주로 불러주는 이유는 관습 때문이지 엄밀히는 더는 공주나 옹주가 아니다.
이처럼 신분이 강등하는 일을 화랑세기는 족강族降이라 했다. 속한 족속이 하강했다는 뜻이다.
남자도 왕족에서 족강한다. 왕자들은 적통 자식인 대군大君이나 후궁 소생인 군君은 일정한 나이, 보통은 결혼과 함께 출궁한다.
다만 남자들은 1대에 한해서 출궁해서도 계속 대군 혹은 군이라는 지위를 유지한다. 이 점에서 족강하는 여성에 견주어 불평등 요소가 있다.
하지만 잊은 점이 있다. 여성이 족강하는 이유는 그대로 공주나 옹주 신분을 유지하면 남편과 시가를 능욕하며 군림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족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 대군이나 군은 그들이 가계를 독립하는 까닭에 족강할 필요가 없다. 다만 대군은 잠재적 대권 후보자인 까닭에 그를 왕이나 세자는 견제해야 한다. 그래서 일대에 한해서만 그들의 지위를 주는 것이며 그들의 소생은 바로 군君으로 하강 족강한다.
이런 체제는 여성 차별 요소가 보인다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라 여성은 남성에게는 없는 특권이 있으니 그건 신분이 거꾸로 상승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사가에서 살던 여성이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되면 신분이 언터처블이 된다. 출궁한 대군 마누라가 되면 부부인이 된다.
왕족이 남녀성비를 갖추는 비밀이 바로 이
입궁入宮
이다. 출궁 혹은 궁궐이 신분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입궁이다.
입궁과 더불어 황족 왕족이 되듯이 출궁은 그 반대다.
요컨대 신분은 거주지가 결정한다.
내가 말한 이와 같은 사항들이 저 맨앞에 첨부링크한 일본 천황가 고무라 마코토 小室眞子 라는 여성에게서 그대로 관철함을 본다.
저 고무라 마코토는 결혼 이전에는 마코토 나이신노우 眞子内親王(まこないしんのう)라, 결혼 이전에는 인민이 전하殿下라 불렀다. 현재의 일본 천황 덕인德仁이 죽으면 그 바로 아래 동생으로 계승 1순위인 기시노노미야 후미히토(きしののみや ふみひと) 친황秋篠宮文仁親王의 장녀로 신분은 공주였다.
출가 이전 공주 시절까지 동경도東京都 항구원소판港区元赤坂의 적판어용지赤坂御用地에 있는 秋篠宮邸에 살았다. 아버지는 황자이자 황세제로서 궁을 떠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형이랑 같은 궁궐에 살 수는 없어 다른 궁궐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천황 형제가 각기 다른 宮을 주거지로 삼는다는 이 사실을 한국사를 하는 친구들도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한다.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주거지라고 말이다. 宮에서 거주해야 신분을 유지한다.
하지만 일반 평민과 결혼한 공주가 계속 궁궐에 살 수는 없다. 나가서 딴 살림을 차려야 하며, 나아가 그 남편이 황족이 아니기에 자연히 이 공주는 공주라는 신분을 잃는다. 이것이 족강이다.
그래서 출궁은 그만큼 중요하며, 그것의 절대기반인 宮이야말로 황족 혹은 왕족을 구성하는 절대의 조건임을 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만 왜 신라시대 그 서울 경주에 무수한 宮이 있었는지를 이해한다.
*** 아래는 조선시대 외명부 봉작제도로, 기호철 선생 소개다.
외명부(外命婦) 원 봉작(封爵)은 남편의 직급을 따른다. 서얼(庶孼) 및 재가(再嫁)한 자에게는 봉해주지 않고, 개가(改嫁)한 자는 추후에 빼앗는다. ○ 왕비(王妃)의 어머니·세자의 딸 및 2품 이상인 종친의 처에게는 모두 고을 이름을 붙여서 봉해준다.
공주(公主) 왕의 적녀, 옹주(翁主) 왕의 서녀, 부부인(府夫人) 왕비의 어머니. 정1품, 봉보부인(奉保夫人) 대전(大殿)의 유모. 종1품, 군주(郡主) 왕세자의 적녀. 정2품, 현주(縣主) 왕세자의 서녀. 정3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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