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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풍수설을 돈독히 믿은 한산이씨, 그리고 그 사위 한음 이덕형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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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

 

조선 중기를 살다간 인물로 이덕형李德泂이란 이가 있다.

예조판서와 판의금부사,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字가 원백遠伯이요, 호가 죽천竹泉이라,

그의 중국 사신행 견문록 죽천행록竹泉行錄이 2001년 세상에 공개되기도 했다.

1566년, 명종 21년에 태어나 1645년, 인조 23년에 사망했다. 

저 시대 이덕형이라 하면 자칫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이덕형과 혼동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이덕형은 한자를 李德馨이라 써서, 李德泂이라는 죽천과는 다른 사람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덕형은 字를 명보明甫라 하며, 한음漢陰은 호다.

죽천 이덕형 보다는 다섯 해 먼저인 1561년, 명종 16년에 태어나 각종 고관대작은 다 해 먹었으니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고선 1613년, 광해군 5년에 사망한다. 

따라서 죽천 이덕형과 한음 이덕형은 동시대를 호흡했으며, 당연히 서로 면식이 있었고 무엇보다 교유가 있었다. 

죽천 이덕형 만담록으로 죽창한화竹窓閑話라는 자잘한 이야기 모음집이 있다.

 



그에 보이는 한 토막이다. 

 
우리 일가[죽천은 목은 이색이 중시조인 한산 이씨다-인용자]에 이공 지번李公之蕃·지무之茂·지함之菡은 모두 동복 형제간이었다.

맏이와 막내는 재주와 행실이 일찍이 뛰어났고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

맏이는 퇴계와 가까이 사귀어서 자못 봉마蓬麻의 유익함이 있었고, 막내는 이학理學에 통달하여 학자들이 모두 그를 토정 선생土亭先生이라 불렀다.
 

모두 쟁쟁한 형제들이다.

저 중에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 보인다.

풍수지리설을 당시에는 이학, 곧 이과대학 학문으로 분류했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한다 해서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이들 형제는 모두 지리地理를 알았다.

그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맏형이 그 막내아우에게 말하기를, “한산韓山에 계신 선묘先墓는 산세가 낮고 미약해서 항상 비습卑濕한 것이 걱정되니 이번에 딴 곳을 골라서 옮겨 모시도록 하자.” 고 했다. 


이리하여 형제는 호서湖西의 여러 산을 두루 돌아 보았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록 결정짓지 못하였다.

어느날 홍주洪州 오서산烏鼠山에 올라 사방으로 근처 고을의 산 모양과 물 형세를 바라다 보고 탄식하기를 “이런 명산이 우리 고을 가까이에 있는 줄을 몰랐구나.”고 했다. 

이는 공의 형제가 항상 보령保寧을 왕래했기 때문에 이곳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주산主山에서 10여 리를 뻗어 내리는 동안 혹은 우뚝 솟기도 하고 혹은 낮기도 하여 마치 말이 빨리 달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형세가 꼭 바닷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듯하다가 바다에 다다라서는 멈추어 천 길이나 되게 우뚝 솟았다.

또 다시 산세는 구불구불 흘러 내려가다가 들 복판에서 맺혀져서 조그만 언덕을 이루어 모양이 마치 누워 있는 소와 같았다.

앞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서 넓게 끝이 없고 또 온 섬의 봉우리가 뾰죽뾰죽 바로 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고만高巒이라고 부르는데, 혹은 고려 때 만호보萬戶堡라 불리기도 했다.

맏이가 여기에 올라가 보고 기뻐하여 비로소 묘자리를 정하고 저물어서 산밑에 있는 어촌에서 잤다.


이를 보면 토정 이지함만 아니라 그 형제들이 모두 풍수지리설 단단한 신봉자임을 본다.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그 이튿날 주인 할멈이 맏이에게 묻기를, “손님은 어디서 오셨소? 어젯밤 꿈에 머리털이 하얀 늙은이가 모양도 기이하게 생겼는데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집에 온 손이 장차 내 집을 뺏으려고 한다.’ 합디다.”고 말했다. 

맏이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필경 산신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례를 모시려 할 때, 그 아우 토정에게 이르기를, “장례를 모시고 난 뒤 기해년에는 우리 세 형제가 모두 귀한 자식을 얻을 것인데 다만 너의 아들이 불행하겠으니 이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그 뒤 기해년에 맏이는 과연 아들을 낳았으니, 이 분이 바로 아계鵝溪 이 상공 산해(李相公山海)이고 그 가운데 분도 또 판서判書 산보山甫를 낳았다.

그리고 토정도 아들을 낳았지만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그 중에서도 뛰어났는데, 나이 겨우 2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편詩篇이 호서지방에서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왼다.

 
세 형제 중 자식 농사는 맏이 이지번이 가장 잘 지었으니 그 유명한 이산해를 낳은 까닭이다.

글씨로 이름을 날렸고, 영의정까지 역임했다.

둘째도 만만치는 않아 이산보를 낳았으니, 이 아들은 임란 당시 선조를 호종扈從하고선 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다.

다만 생각보다는 일찍 세상을 떴다. 

 

이산해. 영정이 좋은 상태로 제공되는 것이 없다.



이들 형제랑 그렇담 한음 이덕형은 무슨 관계일까?

 
이 상공 덕형(李相公德馨)은 곧 아계鵝溪의 사위인데 그도 또 풍수설을 믿었다.
 

한음 이덕형은 바로 이산해의 사위였다.

이지함과도 얼키설키 인척이다.

저 집안에 장가 들었으니 그랬을까?

아니면 한음도 본래 그랬는데, 마침 저 집안 사위가 되었을까?

아무튼 

 
어느날 내가 마침 가서 (한음 이덕형 선생을) 뵈었더니, 상공相公은 바야흐로 지리를 잘 보는 승려 성지聖智와 함께 앉아서 산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묻기를, “지리地理란 묘연한 것이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공이 말하기를, “이미 천문天文이 있는데 어찌 지리가 없겠소? 다만 세상에 안목을 갖춘 지가 없어서 알지 못할 뿐이지요.

내가 일찍이 처가쪽 선대의 고만산론高巒山論을 보았는데 수십 년 뒤에 귀신같이 맞으니, 전혀 맞지 않는다고만 할 수는 없소.” 하였으니,

세상에서 풍수風水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실상 이씨李氏 집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것이 죽천 이덕형이 한음 이덕형을 직접 면담한 사실과 그 주제, 그리고 그에서 비롯하는 풍속을 증언한 대목이다. 

이에서 죽천은 조선에서 풍수지리설이 일대 유행하게 된 배경으로 한산이씨에 뿌리를 두는 전통을 거론한다.

이는 그만큼 저 집안 풍수설이 영향이 컸다는 증언이기도 한다. 

더구나 당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한음 이덕형까지 그 집안과 인척으로 얽힌데다 그 자신이 독실한 신자였으니 말이다. 
 
(세 형제 중) 맏이(이지번)는 시정寺正 벼슬을 하다 돌아갔고, 가운데 분(이지무)은 일찍 돌아갔으며, 막내분 토정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재직 중 돌아갔다. 

아계 이산해가 처음 태어났을 적에 (아계의 막내 삼촌) 토정이 그 우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맏형 이시정李寺正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이하니 잘 기르도록 하십시오. 우리 집이 이제부터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했다. 

다섯 살이 되자 처음 병풍 글씨를 쓰는데 붓 움직이는 것이 신과 같고 글자 획이 완연히 용과 뱀이 달려가는 것 같았으므로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의 공경公卿들이 와서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먹물을 발바닥에 칠하고 종이 끝에 찍어 어린 아이 발자국임을 표시했는데, 인가에서 지금도 전해오면서 보고 있다.

나이 13세에 충청우도忠淸右道의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뽑혔으니, 그때 지은 글이 만초손부滿招損賦였다.

글 뜻이 노숙해서 글을 아는 자는 이미 그 문장의 수단을 알 수 있었다.

나이 겨우 약관에 과거에 올라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고 여러 번 이조 판서가 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공훈으로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맑은 명성이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아계 이산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런 훌륭한 장인을 뒀다 뭐 이런 뜻이니 이런 글이 혹 한음 이덕형 당대에 간행되었다면 죽천 이덕형은 칭찬을 들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썼을 적에 한음 이덕형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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