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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63

모욕을 주려거든 침을 뱉고 술을 따르게 하라 기원전 18년, 고구려 왕실에서 권력투쟁에 패한 온조가 건국한 백제는 서기 660년 음력 7월 18일,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하니, 이 장면을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해당 일자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18일에 의자義慈가 태자太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는 웅진성熊津城에서 와서 항복했다.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来降. 앞서 의자는 부여 사비성에 웅거하다가 나당연합군이 밀어닥치자 7월 13일, 좌우 측근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줄행랑을 쳐버리니, 사비성에는 아들 융隆과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이 남아 협상을 통한 돌파구를 기대했던 듯하거니와, 혹 사비성이 무너진다 해도, 이른바 정부를 분산함으로써 후일을 도모하.. 2020. 9. 1.
없는 허상 찾아 백년을 헤맨 신라 태조 성한太祖星漢 신라 중고기 이래 고려 초기 금석문을 보면, 신라 왕실, 혹은 그 왕실 김씨의 시조로 태조 성한이라는 표현이 더러 보이니, 그것을 찬술 연대로 보면 문무왕 사후 신문왕이 건립한 문무왕비에서 아마도 문무왕(김춘추가 기준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음)을 기준으로 해서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이라 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문무왕 동생 김인문 비문에서도 “태조성한太祖星漢”이라 했다. 하대로 내려와 흥덕대왕능비 편에서도 “태조성한太祖星漢”이라는 표현이 보이며, 신라말~고려초를 살다간 두 승려 중 진철대사 보월승공탑에서는 그를 일러 “성한星漢”의 후예라 하고, 비로암 진공대사보법탑에서는 그의 선조를 “성한聖韓”이라 했다. 이에서 드러나는 星漢 혹은 聖韓을 찾아 한국고대사는 지난 100년을 허비하면서 이르기를 혹.. 2020. 7. 27.
텍스트 뒤집어읽기...욕쟁이 엄마 前漢 말기 유향劉向이 편집한 역대 여성 열전인 《열녀전列女傳》은 은상殷商 왕조 실질의 개창주인 문왕文王을 낳은 어미 태임太任이 문왕을 임신했을 적에 태교를 다음과 같이 했다고 적었다. 及其有娠,目不視惡色,耳不聽淫聲,口不出敖言,能以胎教。 "(아들 문왕을) 임신하자 눈으로는 나쁜 색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방자한 말을 뱉지 않았으니 이런 방식으로 태교를 했다." 텍스트는 뒤집어 읽어야 한다. 임신하고서야 이러 했다는 말은 임신하지 않았을 적에는 "눈으로 보는 것이라곤 나쁜 색 일색이요, 귀로 듣는 소리라곤 야동 소리 뿐이었으며, 입만 열었다 하면 욕찌거리였다." (2014. 7. 11) 2020. 7. 11.
무시 농장 물대기 위한 저수지 영천 청제菁堤 경북 영천에 있는 청제菁堤 라는 저수지다. 그 조성 내력은 물경 천오백년을 헤아린다. 그 내력을 적은 신라시대 기념물이 기적처럼 오늘에 전한다. 이를 일러 영천 청제비 永川菁堤碑 라 한다. 역사책에 빠짐없이 나오니 졸라 중요한 비석인갑다 알아두마 된다. 그 비석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 상세히 소개한 적 있으니 중언부언 피한다. 사진 속 주인공은 포토바이오다. 청제菁堤를 논할 적에 심각성을 몰각한 대목이 있다. 왜 하필 菁 이란 글자를 썼겠는가? 단순히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발상이라면 淸 이나 靑과 같은 뜻도 쉽고 쓰기도 쉬운 글자 다 제껴두고 저 글자를 썼겠는가? 이는 이 저수지 기능을 생각할 적에 결정적인 가늠자가 된다. 菁이란 뭔가? 무시다. 순무다. 무시 농장이었다. 김장할 때 필요한 그 무시다. '.. 2020. 4. 20.
두 가지 돌림자를 쓴 최언위崔彦撝의 네 아들 고려 혜종 원년(944)에 향년 77로 죽은 최언위崔彦撝의 아들로는 최광윤(崔光胤)·최행귀(崔行歸)·최광원(崔光遠)·최행종(崔行宗) 이 있다고 《고려사》 그의 열전에 밝혔다. 네 형제 중 각각 둘이가 다른 돌림자를 쓴다. 내 짐작대로라면 어머니가 각기 다를 가능성이 있다. (2016.1.10) *** 고려 초기만 해도 항렬자 사용이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다. 저보다 대략 백년이 지난 김부식 시대가 되면 항렬자 사용이 빈출한다. 항렬은 문중의 등장과 밀접하다. 물론 조선시대 개념으로 그것을 곧이곧대로 적용할 순 없다. 요즘 보다 고려시대는 개명이 더 잦다. 따라서 최언위 네 아들도 그런 나중의 개명에 따라 우연히 저리 되었을 수가 있다. 한데 그리 보기엔 너무 공교롭다. 두 아들이 光, 다른 두 아들이 行이.. 2020. 2. 10.
잘 죽자..장엄한 제왕의 죽음 고려사절요가 채록한 성종의 죽음이다. (997년) 겨울 10월 무오일에 왕이 병환이 매우 위독해져서 조카 개령군(開寧君) 송(誦)을 불러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갔다. 평장사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도록 청하니, 왕이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죄 있는 자를 놓아 주어 부정하게 목숨을 연장하려 하기까지 하겠느냐. 더구나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전을 펼 수 있으랴" 그러고는 허락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왕이 병들면 죄수를 사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를 통해 복을 구하고자 하는 관습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이를 거부한다. 내가 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다 석방해 버리면 내 뒤에 즉위하는 새로운 왕은 무엇으로써 신민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냐는 말이.. 2020.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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