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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건준의 문제는 왜 발생했는가

by 초야잠필 2023.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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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좌파 진영에서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문제를 보는 시각은 비교적 간단하다. 

해방 후 건준이 총독부로 부터 치안 유지권을 인계받아 "건국을 준비하였으며" 9월 초에는 이를 "인민공화국"으로 발전시켜 국가로까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준의 "법통"을 부여하기 위해 이 건준이라는 것은 사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해방 1년 전부터 여운형呂運亨(1886~1947. 7. 19)은 이 전국적으로 조직한 "비밀조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방후 스토리를 써 내려가면 당연히 9월 초에나 들어와 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인수인계받은 미군정은 "불청객"이 될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건준이 이렇게 한달 조금 못되는 기간 동안 해프닝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이 일본 본토에 먼저 GHQ를 수립하여 군정을 시작한 다음,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진주를 시작하면서 나오는 "시간차" 때문이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나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때까지 약 3주 정도 공백이 존재하는데 이 기간이 바로 무주공산 상태가 되어 버린 조선땅에서 "건준"이 활동할 공간이 되었던 셈이다. 

이 시기에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반도의 정치 타임테이블은 군정과 함께 돌아간다는 점을 싫든 좋든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옳다. 

그 때문에 이승만도, 김구도, 김일성도 해방 이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짧게는 한달, 길게는 3개월이 지나서야 환국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이후 군정이 시작되는 때까지의 기간동안 조선이 스스로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면 이들이 이렇게 여유있는 환국을 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건준"이라는 조직은 군정이 시작될 때까지의 국내 치안만 유지한다면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총독부도 김성수건 (원래 여운형보다 김성수를 먼저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운형이건 간에 불러서 치안 협조를 요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여운형이 군정이 시작될 때까지의 3주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리할 정도의 과속 페달을 밟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조선총독부가 항복할 대상은 미군정청이라는 점에서 이 군정청의 업무가 시작되기 하루 전에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사건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상식 밖이라 이해하기 어렵다. 

여운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군정 시작 전까지 3주간 저런 정치적 행보를 보인 것일까? 

개인적으로 여운형의 건준은 실제 역사적 의미보다 매우 과대평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해방이후 난센스 해프닝 정도로 취급하면 적당한 정도의 이야기가 언제부터인지 지나친 평가를 받고 있다고 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본은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 것이며 조선총독부는 미국 명령에 따라 조선의 군정청에 모든 권리와 의무를 이양했다. 여운형이 군정청 출범까지 한 달이 못 되는 기간 동안 보인 행동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해방정국에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를 보인 사람이 여운형으로 그가 당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인지조차 의문이 가는 때가 있다. 사진은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한 조선의 미군정청 업무개시일 광경.



*** Editor's Note ***


필자가 계속 제기하는 여운형과 건준의 문제는 실은 김재원을 보면 어느 정도 목적성이 풀린다.

느닷없이 온 해방의 기쁨도 잠시.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하릴없던 김재원은 이 혼란한 정국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빈둥대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무주공산이니 그걸 내가 먹자 하고 달려가서는 무혈입성한다.

자체 흡수하고는 미군정이 들어오자 그때부터 뻔질나게 군정을 들락거린다.

어느 순간 박물관은 대안이 없다 해서 김재원이 승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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