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조선의 돼지를 묘사한 외국인의 기행문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다.
조선의 돼지는 까맣고 작은데
성장이 느리고 처음 봤을 때 테리어 만한 크기에 놀랐다는 증언도 있다.
거대한 비육의 양돈만 보아온 우리로서는 불과 백년 전까지 우리 농촌 마을에 이런 돼지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것이 불과 100년전 조선 전체에 있던 돼지의 모습이다.
꿩에 대해서는-.
들에 꿩이 너무 많아 산길을 갈 때 계속 꿩을 쫒아 내며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왜 19세기 말까지도 한국에서 꿩이 소비가 닭 고기 소비를 압도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들판에 가면 꿩이 지천이니
닭을 힘들게 키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부북일기 등 일기를 보면 꿩사냥을 한 번 나갔다 하면 기본이 백마리씩 잡아와서
주변에 나눠주곤 하니
닭이 왜 필요하겠는가.
한편
조선의 말은 조랑말로 성질이 좋지 않지만 적게 먹고 멀리간다.
19세기 말의 조선의 말에 대한 외국인의 기록이다.
또한 소는 크고 온순하며 힘이 좋다.
모든 외국인이 극찬하는 조선의 가축은 소다.
이 때문에 한우는 20세기 21세기에도 살아남아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은 우리 기록에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서에서 이런 가축 모습을 묘사할 리도 없고
심지어는 일기에도 없다.
왜냐. 이런 가축의 모양과 생태 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적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술은 비교의 대상이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해 진다.
심지어는 한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외부 대상과의 비교를 차단해 버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
덧없는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다는 이 유명한 말을 이제는
"남을 아는 만큼 내가 잘 보인다"라는 말로 고쳐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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